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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Dec 30. 2015

아빠에게 희망을

아빠의 백일잔치 준비하기

돌잔치 준비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으니, 남편이 옆에서 왜 백일잔치 한 얘기부터 안 쓰냐고 그런다. 백일잔치는 시간이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시의성이 떨어진다, 너무 개인 사진이 많이 올라가게 될 것 같아서 싫다 했는데도 써줬으면 좋겠단다. 아마도 본인의 공이 매우 컸던 이벤트여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대신 써주는, 엄마가  총감독하고, 아빠가 준비한 백일잔치 이야기.



윤서의 백일잔치는 초여름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6월이었다. 백일잔치는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도 집에서 준비했다. 윤서가 태어나기 직전에 신혼집을 정리하고 친정으로 들어와서 공동 육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린 요새 보기 드문 대가족 형태로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일잔치는 나 혼자 준비하는 잔치가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함께 역할을 해야 하는 그런 날이었다.


이 날 윤서는 할아버지 손에도 갔다가,
증조 할아버지에게도 갔다가,
외할머니에게도 날라간, 이리저리 날라다니던 바쁜 하루였다.

백일 잔칫날,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백일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새벽부터 강남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나갔다.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은 마음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감당 못할 양의 꽃을 사 왔다. 역시나 꽃 꼽기도 전에 사 온 거 포장 풀다 지쳐버렸다. 결국 성당 제단 꽃 봉사단 회장님 출신인 시어머니가 오셔서 꽃장식을 해주셨다. 성당 스타일로 해주시면 어쩌나 속으로 걱정했는데, 내가 연출하고 싶었던 스타일 그대로 표현해주셨다.


꽃시장에서 가져온 꽃들 포장 풀다 지쳐버린 아침


음식은 지하 베란다에서 바비큐 구이를 했다. 엄마가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한 대하를 넉넉하게 주문하시고, 소고기와 삼겹살, 야채 등을 바비큐 그릴에 구웠다. 바삭바삭하게 굽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식구들 입맛에 맞게 남편이 맛있게 구워주었다. 다른 복잡한 음식 대신, 파무침, 김치찌개, 밥 딱 이렇게 세 가지 테이블에 차려 놓고 각자 원하는 만큼 드시도록 뷔페 형식으로 준비했다.


보통 이렇게 집에서 손님을 치르면 누구 하나는 계속 희생을 해야 한다. 먹지도 못하고 계속 음식 만들고, 서빙하고  심부름하느라 지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즈음이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가족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봐야 한다. 집에서 하는 잔치이지만, 그렇게 되는 건 결코 싫었다. 윤서의  백일잔치에 남편이 셰프로 나선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야외 베란다에는 아기 느낌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로 꾸몄다. 하늘색과 병아리 노란색을 메인 컬러로 천장에 페이퍼 볼을 다니 한층 파티 분위기가 났다. 아침부터 아빠랑 남편이 올라가서 열심히 꾸몄다. 여자아이니까 분홍색으로 할까 살짝 고민하다가 너무 식상할 것 같아 윤서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색으로 조합했다. 인터넷에서 산 종이 공 몇 개 달아놨을 뿐인데, 썰렁했던 지하실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요즘 겨울 방학을 맞아 잠깐 한국에 들어온 남편은, 밤에 몇 번씩 깨서 윤서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다시 재운다. 엄마의 직감으로 난 윤서가 꿈틀꿈틀 거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난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남편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못 들은 척, 잠자는 척한다. 처음엔 허둥지둥 대고, 아기도 익숙하지 않은 아빠가 불편한 듯 호흡이 잘 안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2주를 보내니 이젠 내가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면 이미 모든 상황이 평화롭게 정리되어있다. 이젠 윤서도 아빠가 주는 우유를 꿀떡꿀떡 잘 받아먹는다.


아기 키우기, 백일잔치, 돌잔치, 이 모든 게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삶은 너무 팍팍해진다. 너무 잘 하려고 하면, 포장 풀다가 지쳐버린 내 꽃꽂이처럼 된다. 모든 걸 다 내 손으로 하려다 보면 나중에 제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냥 앞으로도 아빠가 미숙해도, 실수해도, 성에 안차도, 제 1 책임자의 역할을 부여해줘야겠다. 비록 시간은 걸릴지언정, 이번처럼 결국 잘 해낼 테니까. 윤서의 즐거웠던 백일잔치는, 앞으로 두고두고 뿌듯하게 얘기할 초보 아빠의 무용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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