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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Dec 10. 2018

목욕탕 단상

어제 저녁 시댁에 도착한 남편은 서울에서 운전하고 내려오는 내내 콜록콜록거리더니 완전 몸살이 났나 보다. 밤새 낑낑 대던 남편은 이튿날 아침, 목욕탕에 가고 싶다고 했다.


시댁이 있는 대구 달서구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있는 곳인데 왠지 이 아파트촌이 지어질 무렵 같이 생겼을 것 같은 ‘보광 목욕탕’이 자리 잡고 있다. 난 원래 대중목욕탕의 필요성을 잘 못 느끼고, 뜨거운 곳에서 쉽게 현기증을 느끼는 터라 목욕탕을 가는 건 연례행사다. 원래는 남편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가 같이 다녀오기로 마음을 바꿨다. 얼마 전 봤던 임경선 작가의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책에 자전거를 타고 사이좋게 동네 목욕탕에 각자 남탕, 여탕으로 헤어지는 젊은 부부가 등장하는데, 비록 여기가 교토는 아니지만, 그런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진 것이 그 이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이와 남편 모두 감기가 걸려버렸다


목욕탕 입구에서 시어머니께 받아온 쿠폰 두 장을 내밀었더니 쓰윽 우리 얼굴을 확인한 언니가 여탕 한 장, 남탕 한 장 입장권으로 바꿔줬다. 20장을 묶음으로 사면 장당 4,500원이라고 쓰여있었는데, 다들 최소 20장~100장 묶음은 사놓고 정기적으로 이 곳을 찾는 것 같았다. 어디가 여탕이고 남탕인지 두리번거리는 어리버리한 외부인은 우리 둘 뿐이었다.



남편과 한 시간 뒤에 다시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목욕탕을 찾아 총총 들어갔다. 2층 여탕 입구의 불투명하고 무거운 유리문을 여니 마치 20세기 ‘서래탕’으로 입장한 것 같았다. 꼬마였을 때 엄마랑 가끔 다녔던 우리 동네 목욕탕. 폭포가 그려진 냉탕과 온탕이 있고, 머리를 감고 욕탕에 들어가는 게 순서라고 알려주는 교육적인 고인돌 만화가 그려져 있던 곳, 넓은 평상 위에 판매하는 속옷이나 양말, 마사지 크림 등이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던 곳. 거의 30년 동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서래탕’이 다시 또렷이 되살아났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건 하나 걸치지 않고,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았으니 그 장면을 보는 누구나 1988년이라고 하면 믿을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보광탕’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우리 동네 ‘여성 전용 사우나’의 1/3 가격에도 이렇게 성업 중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단골 고객들 덕분인 것 같았다. 각자 개인 사물함에서 바구니를 착착 꺼내어 옆에 손님들과 ‘오늘은 좀 늦게 왔다’며 인사를 한다. 한쪽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거대한 1세대 러닝머신 한 대도 있다. 탈의실에서 목욕 용품을 챙긴 후 목욕탕에 가려면 건물 계단을 통해 한층 올라가야 되는데 꽤 시원한 공기를 뚫고 속옷 하나 걸치지 않고 올라가는 그 느낌이 아주 신선하다.


목욕탕 한 켠 마사지실에는 침대 두 개가 있는데 텅 비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온 손님들은 때 미는 데 있어서는 다들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심지어 경상도에만 있다는 ‘셀프 때밀이 기계’도 있으니 말이다. 벽에 붙은 이 동그란 기계에 동전을 넣으면 때수건이 돌돌돌 돌아가는데 각자 등을 데고 이 쪽 저 쪽 방향을 바꿔가면서 사용하면 된다. 몇 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땐 도대체 저것은 무엇인가, 한참을 바라봤는데 이젠 저 기계 앞에서 저마다의 기술을 열심히 뽐내는 아주머니들을 보는 풍경도 익숙하다.


욕탕은 온도별, 향기별로 3개가 있는데 냉탕 벽면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동화책 ‘장수탕 선녀님’에 나올 법한 계곡 풍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그 옆에는 온돌방, 소금방 등 각 콘셉트가 있는 사우나실이 몇 개 있는데 난 그중에서 제일 무난해 보이는 온돌방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옆에 놓여있는 목침을 하나 가져다가 수건을 바닥에 깔면 뜨뜻한 온돌 기운이 온몸을 덥혀준다. 사우나실 천장에는 서까래가 연출되어있어서 마치 한옥 온돌방에 누워있는 느낌이다. 남편과 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만 없었다면 노곤 노곤하게 몸이 풀어져서 깊은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여기 입장료 약 4천 원, 4불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이렇게 목욕도 하고 온돌방에 누워 쉴 수도 있고, 소금탕에서 뒹굴뒹굴 마사지도 할 수 있다니! 시카고 우리 동네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식 목욕탕이 40불에 아이 입장권까지(무려 35불!) 따로 사야 되는 걸 감안하면 남은 한국에서의 시간 동안 매일매일 여길 이용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시간 동안 예상 밖의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으며 찬 바깥바람을 맞을 채비를 했다. 아까 목욕탕 안에서 내게 샴푸를 빌려주신 인상 좋은 친절한 아주머니께 음료수 한 잔 사드리며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하필 지갑도 두고 오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가시는데 꾸벅 인사를 드렸다. 왠지 몇 년 후 일요일 아침에 보광탕에 다시 와도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목욕 후 음료수 한 잔 사드려야지. 그때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려나? 아마도 외부인이 거의 없는 곳이니 기억해주실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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