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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an 05. 2019

사실 아이와의 여행은 극기 훈련입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이리저리 여행을 잘 다니는 걸 보면서 '저 고생하면서까지 가는 걸 보면 여행을 진짜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글쎄,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난 분명 어려서부터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이건 나 혼자서 떠날 때 얘기다. 아이를 데리고 세상 어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건, 아이가 한 살 때나, 두 살 때나, 세 살, 네 살, 다섯 살이 되었어도, 쉽게 내키지 않는 일이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나가는 길에서 조차 '그냥 집에 있고 싶다' 생각을 하는 건 사실 매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루어지는 의식 중 하나이다.


아이와 첫 여행은 5개월 즈음인가 하와이. 이 때만 해도 온 가족이 따라가서 아이 하나만 바라보는 여행이었다.
돌 즈음, 남편의 어린 시절 추억 찾아 홍콩 여행. 아이와 다니면 평소 우스워 보이던 일들을 기꺼이 줄서서 하게 된다.
저 빨간 트렁크를 들고 아이는 전세계 여행을 했다. 이젠 크기가 너무 작아져서 지난 번 여행에서 은퇴를 했다.
이제는 아이와 함께 비행기 타는 게 조금 수월해졌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늘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그리스 산토리니, 페루 마추피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 보통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쉽게 고려하지 않을 도시들로 여행을 하게 되는 건 거의 다 남편 덕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의 고집' 덕분. 사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것에 불필요한 돈을 쓰는 걸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결혼을 한 후에는 점점 여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이젠 우리 집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은 모두 남편 몫이 되어버렸다. 처음 딱 들었을 때 마치 동계 극기 훈련처럼 들렸던 이번 겨울 동유럽 여행 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남편이 짰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두 세 번쯤 갈아타는 일도 이젠 어렵지 않다.
아이들에게 전세계에서 제일 좋은 공항은 아무래도 인천 공항 같다. 곳곳에 놀이터가 있다.
이번 여행 마지막 도시였던 부다페스트를 떠나면서 남편이 말했다. "이젠 윤서랑 아프리카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결과적으로 우리 셋이 이렇게 고생해서 떠나는 여행은 다녀오고 나면 좋지만, 그 과정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아이를 데리고 한겨울에 동유럽을 여행한다는 건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인스타에 몇 장 올리는 웃고 있는 사진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식구들 히트텍에 아이의 방한 용품들 챙기느라 정작 내 옷이 들어갈 자리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여행 내내 난 같은 옷이다. 유럽에 갔으니 미슐랭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좋은 미슐랭 식당들은 어린아이 입장이 불가하고, 설령 간다 해도 윤서가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다. 그래서 내 트렁크 안엔 항상 우리 식구가 2박 3일 정도는 먹을 수 있는 넉넉한 햇반과 레토르트 음식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거기다가 남편이 심각한 길치에다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은,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할슈타트 호수에서 물수제비 뜨기 대회. 여행을 잘 왔다 느끼는 순간.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여행을 하고 돌아와도 또다시 다음번 여행은 어디로 갈까 상상을 하는 건, 여기서 만들어내는 우리들만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2주 정도 셋이서 똘똘 뭉쳐서 고생을 하고, 새로운 경험도 하고 돌아오면 또 반년을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도 살아낼 힘을 얻는다. 여행은 주말에만 잠깐 집에 와서 얼굴 비추고 다시 출장을 떠나는 아빠와도 윤서가 온전히 24시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에게 여행은 사실 그곳이 유럽이라서 좋은 게 아니라, 엄마, 아빠 품이라서 좋은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남편이 엄청 밉다가도, 아이 손을 잡고 내 손에 들려있던 무거운 짐을 자기 어깨에 들쳐 메고 내 앞을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등을 보고 있으면, '아, 그래도 내가 저 사람을 믿고 살아가지' 생각하며,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마도 이게 유일한 완전체 가족 사진인 것 같다. 부다페스트 의회 앞.
2018년 마지막날은 부다페스트 목욕탕에서.


이제 내 집이 있는 시카고에 돌아왔다. 내 나라도, 내 고향도 아니라 아직은 낯선 곳이지만, 그래도 익숙한 내 소파, 내 식탁, 내 책, 그리고 아이의 사랑스러운 핑크색 방이 있는 곳이다. 뜨끈하고 매콤한 귀국 환영 김치찌개도, 시차 적응할 때까지 자고, 자고, 또 자도 아이가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아이를 돌봐주는 가족들은 없더라도, 그래도 여기가 이제 나의 Home sweet home이란 걸 조금씩 느낀다.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 밀레니엄 파크의 The bean이 반짝이는 걸 보면, 마치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는 길 63 빌딩과 서울타워라도 본 냥, 이제 내 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나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그래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우리집에 도착한 순간이 제일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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