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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an 18. 2019

빅맥 지수가 있다면, 유모차 지수도 있다

아이와 함께 살고 여행하기 가장 좋은 도시는 어디일까




싱가포르에 온 지도 이제 2주, 점점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진다. 이제 웬만한 관광지라는 곳들은 아이와 둘이 다 가본 것 같다. 싱가포르가 정말 선진국이라 느껴지는 것이 유모차를 끌고 어디를 나가도 편리하게 다닐 수 있다. 유모차를 끌고 전 세계를 다니다 보니 도시별 빅맥 지수처럼 나만의 유모차 지수도 생각해보게 된다. 겉으로는 화려한 도시도 사실은 유모차나 휠체어가 절대 혼자 다닐 수 없는 취약한 시설을 가진 곳이 많았다. 이건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육아의 어려움 같은 것들이다. 직접 유모차를 끌고 어떤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가보면 어떤 부분이 교통 약자를 위해 고쳐져야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아이와 여행해 본 도시별 유모차 지수


지난 3년 동안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다녔던 도시들의 유모차 지수를 한 번 만들어보았다. 물론, 내가 간 곳들이 그 도시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도시에 일주일 정도는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다녀본 체감의 결과다.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여행했던 남편과 각각 점수를 매겨 둘의 평균치를 내봤다.


우리의 주관적 유모차 지수, 2015-2019


시설도, 사람들 배려도 교통 약자를 위한 가장 친절한 곳은 북미 도시들


여러 곳을 다녀보니 역시나 가장 잘 되어있는 곳은 미국, 캐나다다. 물론 워낙 넓은 땅이라 모든 도시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시카고나 그간 아이와 가본 뉴욕, 보스턴, 아틀랜타, 토론토 등 큰 도시들은 다 그렇다. 아마도 크고 작은 건물을 지을 때 어떤 법규가 있어서 이걸 어기면 건축 허가가 안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휠체어, 유모차를 위한 시설이 잘 지어져 있다. 대부분 가장 건물 입구와 가까운 정면에 자동문 시설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이런 시설이 비교적 잘 되어있는 싱가포르도 사실은 휠체어가 올라가는 길을 찾으려면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야 될 때가 많은데 없는 것보다야 낫지만 사실 매번 그런 길을 찾는 것도 쉽지 많은 않은 일이다.


하와이에 있는 대부분의 수영장엔, 휠체어를 탄 사람도 쉽게 물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시설이 준비되어있다.


시설과 더불어 고마운 건 교통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들의 문화다. 언젠가 한 번은 한겨울에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있는 우리 집에서 도심에 있는 미시간 애비뉴 끝까지 걸어갈 일이 있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약 2킬로 정도 되는 구간 동안 난 여러 번의 자동문과 엘리베이터를 만났지만, 단 한 번도 내가 문을 연 적이 없었다. 매번 누군가 와서 문을 열어주거나 잡아주었다. 나보다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뛰어와서 문을 열어준 적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문이 열리면 항상 유모차 먼저 들어가고 나가도록 배려하고, 혹시나 서 있는 위치상 사람이 먼저 내려야 할 때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우리가 다 내릴 때까지 문을 잡아주고 내렸다.


얼마 전 강남 신세계 백화점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교통 약자 전용이라고 크게 써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사람들은 잽싸게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섰다. 부피 큰 유모차가 먼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화도 났지만, 마음이 좀 아팠다. 그건 내가 그 전에도 몇 번을 놓쳐버린 엘리베이터를 이번에도 또 놓쳐서가 아니었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수준을 자랑할 시설과 문화와는 무색하게, 우린 너무나도 교통 약자 배려 취약국이었다. 진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 바뀌어야 될 부분이 여전히 많다고 느꼈다.


교토의 한낮엔 단체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온 유치원 선생님들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유모차가 다니기 편리한 곳이다.


비좁은 인도에 큰 전봇대가 딱, 상하이


지난 몇 달 동안 유모차를 밀고 가기에 가장 힘들었던 곳은 상하이었다. 물론 최근에 개발된 건물들은 교통 약자를 위한 시설이 다 만들어져 있었지만,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아예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가 없었다. 유모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거리의 인도 부분 한가운데 큰 전봇대가 서있다. 정말 코메디 같은 도시 설계였다. 그곳을 지나가려면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높은 계단을 한 칸 내려가 차도로 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된다. 한 번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전봇대이다 보니 몇 걸음 걸어가면 또 인도 한중간에 전봇대가 나온다. 언젠가 근처 마트에 들렀다 호텔로 돌아가는 2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다섯 개의 전봇대를 비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진땀이 났던 기억이 난다. 워낙 대륙의 오토바이, 차도 많은 곳이니 차도로 유모차를 끌고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하이다. 유모차야 부모가 잠깐 고생하면 그만이지만, 도대체 휠체어를 타야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밖에 혼자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멋지고 낭만적이라 어릴 땐 내가 참 좋아하던 도시지만, 아이를 데리고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상하이는 지역별로 유모차 지수의 편차가 비교적 심한 곳이다. 주요 관광지만 가려면 유모차도 크게 못갈 곳은 없다.



휠체어 탄 아이들을 위한 그네가 있는 곳, 싱가포르


싱가포르도 대중교통을 타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에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웬만한 건물들은 유모차가 올라갈 수 있는 비탈길이 있고, 자동문도 많은 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통 약자를 타라고 만들어놓은 엘리베이터에 충분히 잘 걸을 수 있는 일반인들이 거리낌 없이 탄다는 점인데, 싱가포르의 국민성을 생각해볼 때 약간 의아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도 싱가포르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 휠체어를 탄 아이들도 탈 수 있는 특수 그네가 설치되어 있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한창 재밌게 뛰어놀아야 되는 시기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닐 것이다. 놀이터를 찾는 아이들의 천 명 중 한 명의 아이에게 이 특수한 그네가 필요하다고 한들, 그 한 명의 아이를 위해 이런 멋진 그네를 설치하는 건 정말 박수받을 일이다.


싱가포르 Admiralty 공원의 휠체어 전용 그네


싱가포르의 가상현실 도시 개발 프로젝트


아침에 컴퓨터를 켜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남편이 기사 링크 하나를 보내줬다. 재밌고도 놀라운 내용이었다.

[Tech & BIZ]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가상현실'로 출근합니다 - 조선비즈 

최근 싱가포르 공무원들이 도시 개발을 할 때 가상현실(VR)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도시 설계를 한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국토를 3차원(3D)으로 본뜬 '가상 싱가포르(Virtual Singapore)'라는 프로그램인데, 드론·인공위성·센서를 동원해 얻은 정보에 정부가 축적해둔 도시의 데이터를 입혀 싱가포르 전 국토를 가상현실로 구현한 것이다. 공무원들은 마치 온라인 도시 게임을 하듯이 시스템에 접속해 교통 체증, 도심 풍향(風向), 인파 흐름 등 각종 변화를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


실생활에 바로 적용될 수 있는 사례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아파트 안의 공원을 만들 때, 주변 아파트 단지의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설계도에서 지우고, 놀이터는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길 수 있다. 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벤치를 늘릴 수도 있다. 이런 식이라면 교통 약자를 위한 최적의 동선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역시 국가 주도의 나라, 싱가포르답다 싶었다.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Virtual Singapore 실제 화면. 페이스북할 실력만 되면 누구나 사용 가능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 몇 년 뒤에 다시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이 나라가 얼마큼 앞서 나가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또 마음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가 그만큼 뒤처지게 될까봐 염려도 되었다. 우리나라도 요즘 여러 도시 개발 관련 이슈들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데, 이젠 그런 관심이 싱가포르 같은 미래형 도시 개발로도 좀 나뉘어져야되지 않을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한 쪽으로만 나있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

 

뭣도 모르고 출산 용품 준비하던 시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저 Royal 유모차. 런던의 유모차 지수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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