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극기 훈련 같기도 했던, 긴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던 동유럽에서의 겨울 휴가를 마치고 다시 지구의 3/4을 돌아 이 곳에 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달 정도를 아이와 지내게 될 것이다. 작년 9월에 싱가포르에 처음 와서 아이와 3주를 지내면서 충분히 이 도시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몇 달 떠나 있다 보니 싱가포르에서의 시간이 그리워졌다. 아이와 함께 도시를 탐험해보기에 싱가포르만큼 좋은 곳은 다시없는 것 같다.
이번에 있는 동안 아이와 하고 싶은 일들을 한 번 정리해봤다. 지난번에 와서 아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해보고, 또 아쉽게 못해봤던 것들을 해볼 생각이다.
마침 1월 19일부터 27일까지는 싱가포르 아트 위크 기간이다. 싱가포르의 내셔날 갤러니는 물론 도심 곳곳에서 아트 프로젝트가 진행이 된다. 지난 번에 왔을 때가 포뮬러 원(F1) 기간이었는데 이 행사를 위해 마치 도시와 시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착착 대동단결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한 나라다'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아트위크도 많이 기대가 된다. 특히 싱가포르의 주요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펼쳐질 미디어 아트, 그리고 나의 관심 분야이기도 한 퍼블릭 아트가 전시된 숲 속 트레일 산책 등 아이와 함께 가면 좋을 행사들이 많이 열린다.
https://expatliving.sg/for-kids/kids-things-todo/
싱가포르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해외 주재원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그런지 괜찮은 유아 프로그램들이 정말 많이 있다. 요즘 싱가포르가 대치동의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로 교육열이 뜨겁고 교육 환경도 좋은데, 유아 프로그램만 봐도 확실히 미국이나 한국보다 선택권이 넓은 것 같다. 재밌는 건 싱가포르엔 영어권 국가들에서 온 엄마들이 정보 공유 차원에서 싱가포르 육아에 대한 라이프스타일 블로그나 웹진의 필진 활동을 많이 하는데 이런 곳에서 쏠쏠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번에 난 아이가 좋아하는 요가나 미술 수업을 알아보고 등록할 예정이다. 나의 짧지만 소중한 자유 시간을 위해서도 이건 정말 중요하다.
https://www.nparks.gov.sg/sbg/our-gardens/bukit-timah-core/jacob-ballas-childrens-garden
남편이 MBA 졸업 후 취업할 곳을 알아볼 때, 만약 미국에서 취업이 힘들게 되면 그 다음으로 어디를 지원해볼까 얘기가 나왔던 후보 도시 중의 하나가 싱가포르였다. 그 때만해도 난 싱가포르에 가서 아이를 키우는 게 내키지 않았는데, 왜냐면 내 기억 속 싱가포르는 마치 플라스틱 시티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조성되었고, 높은 고층빌딩 숲 속에, 빵빵 터져 나오는 에어컨에 실내에서 냉방병에 걸릴 것 같은 그런 곳. 몇 년 전 혼자 여행으로 며칠 왔던 싱가포르는 분명 내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였다. 그리고 난 지난 9월, 그 선입견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물론 다른 메가시티들처럼 도심은 고층 건물에 차들도 복잡하지만, 도심에서 차로 20분만 떨어진 곳으로 나가면 정말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환경 안에 형성된 도시라는 걸 알게 된다. 도심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다. 지난 번에 우리가 지냈던 호텔이 있었던 오챠드 로드에서 차로 5~10분 정도만 가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보태닉 가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제이콥 발라스 어린이 생태 공원이 있는데 아이들이 하루 종일 거기서 놀아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 지난번에는 이 멋진 곳을 너무 늦게 알아 충분히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엔 아이와 그곳에 가서 초록 초록한 하루를 보내는 게 위시리스트에 있다.
이제 돌아오는 3월이면 만 4살이 되는 아이는 지난 서너 달 새 부쩍 큰 것 같다. 그전까지는 마냥 아기 같았는데, 이젠 제법 둘이 대화도 통하고, 감정도 주고받는다. 지난 가을에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얘를 낮잠을 얼른 재워야 되는데, 밥을 먹여야 되는데' 이런 엄마의 1차원적 고민에 대한 문제 해결이 가장 내 삶의 상단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가보고 싶은 어딘가를 간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왠지 이제는 '엄마가 해보고 싶은 곳, 가보고 싶은 곳도 한 번 같이 가볼래?'라고 물어보면 윤서가 '응, 가보자!' 해줄 것 같다.
이번 싱가포르에서 지내는 동안 예쁜 티옹바루의 책방이나 카페에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어보고 싶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둘이 가서 아침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뭐 하고 하루를 보낼까 계획도 짜 볼 수 있는 그런 곳. 티옹바루에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어린이 책방인 Woods in the Books도 있으니 매일 그곳에 들러서 어떤 새 책이 나왔나 뒤적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매일매일 새로운 곳보다는, 하루하루 조금씩 더 익숙해지는 그런 곳을 하나쯤 만들어보고 싶다.
지난 동유럽 겨울 여행에서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좀 힘들더라도 되도록 하루에 한 번 그 날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아이와 지내다 보면 사실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 도대체 뭐하면서 그 아까운 시간이 다 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도대체 이 기억력으로 어떻게 회사를 다녔었나 싶을 정도니까. 잊히기 전에 급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이라 정돈도 되어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루하루 일기장 쓰듯이 적어 내려 간 뒤에야 비로소 그 시간들이 내 머릿 속에 추억으로 저장된다. 이런 기록들이 나중에 아이와 싱가포르에서 시간을 보낼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일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