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이가 중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바빠, 바빠. 난 하루 종일 공부해야 돼서 너무 바쁘고 힘들어."
어느 날 오후, 아이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이 소리를 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난 내 입으로 한 번도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만 세 살 아이 입에서 공부를 해야 돼서 바쁘다니!' 아이는 도대체 이 소리를 어디서 들은 건지 그 이후로도 이 소리를 사나흘에 한 번씩은 했다. 물론 아이가 이 소리를 하면서 꺼내들은 건 고작 '헬로키티 1,2,3 숫자놀이책'. 이마저도 요즘 부쩍 숫자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엄마가 주문해서 보내주신 놀이책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이는 도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한 걸까. 아이는 분명 '공부는 스트레스'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공부가 스트레스라는 사실은 학자 타입 아니고서야 만고 불변의 진리지만, 벌써부터 아이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이는 이 소리를 누구한테 들은 걸까. 평생 살면서 공부하라는 소리 해본 적 없는 우리 엄마가 했을 리는 없고, 남편도 나보단 선행학습의 중요성은 높게 사지만, 벌써부터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 줄 사람은 아니다.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얘기를 꺼내봤다. "엄마는 윤서가 하루 종일 놀고, 놀고, 또 놀았으면 좋겠어. 공부는 나중에 큰 언니 돼서 하면 되는데." 그랬더니 아이는 대뜸 "아냐, 큰 언니가 되려면 선생님이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된다고 했어." 아, 아이는 한국의 놀이학교 선생님에게 들은 거였다.
어쩐지 놀이학교 두 달을 다니고 나서 아이가 부쩍 똑똑(?)해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에서 두 살 반, 말을 막 배울 시기에 이중 언어 환경에 놓여 있던 아이는, 사실 영어도, 한국어도 둘 다 다른 또래들의 절반씩만 할 줄 알았다. 난 그게 아이가 처한 환경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서두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고맙게도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한국말이 늘기 시작했다. 처음에 왔을 땐 내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줘야 했던 윤서의 한국말이, 이젠 가족들 누구와도 꽤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런데 사실 늘은 건 한국말 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미국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았던 꽤 어려운 영어 단어도 알기 시작하고, 또 어느 날부터는 중국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에 사는 만 세 살 아이가 3중 언어라니 정말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교육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쫑알쫑알 중국어로 노래 가사를 다 외워서 부르는 아이가 귀엽고 신기해서 난 계속 불러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앞서가는 유아 교육의 밝은 점만 보였다. 아이가 "바빠. 바빠"하며, 한숨을 내쉬기 전까지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새로운 놀이 학교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미국 유치원에서도 배우지 않은 알파벳과 단어들을 배워오고, 또 중국어로 동요를 배워오는 건 솔직히 기특하지만, 만 세 살 아이 입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물론 그 말이 별생각 없이 다른 친구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반 장난스러운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추천을 받아 새로 찾아간 놀이 학교의 원장 선생님에게 영어, 중국어 수업에 대해 물어봤더니 웃으면서 "어머니, 지금 윤서는 한국말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놀아야 되는 시기예요"라고 하셨다.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이 놀이 학교에선 아이에게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된다'는 무시무시한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전 학교에서 선생님 입으로 정말 그 얘기를 하셨든, 안 하셨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 세상 모든 걸 새로 배워야 될 아이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즐겁고 신기한 일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배우는 게 즐겁다고 한다면, 그때는 3중 언어든, 4중 언어든, 5중 언어든 그건 내 능력껏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