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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an 28. 2020

만 4살, 공부의 출발선에 서다

이중 언어 환경 아이 키우기

주말에 윤서를 데리고 키자니아를(어린이 직업 체험 공간) 다녀온 동생이 꽤 놀란 듯이 물었다. "언니, 윤서 한글로 자기 이름 못써?" 한 두 달 전쯤 분명히 가르쳐주고 혼자 곧잘 썼는데, 한국에서 신나게 노는 동안 그새 까먹었나 보다. "응, 아니, 얼마 전까지 썼는데..."만 4살 아이에게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쓰는 법을 못 가르친 엄마는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키자니아에 갔더니 윤서보다 더 어린아이들도 자기 이름을 척척 써내는데 우리 딸은 이모한테 대신 써달라고 했다며 언니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긴 하냐는 것이다. 아이가 계속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녔다면 또래 친구들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비교라도 할 텐데, 벌써 몇 년째, 한국 반, 미국 반 생활을 하다 보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비교할 대상도 없다.


문제의 발단. 키자니아에서 도대체 왜 자기 이름을 쓰게 했단 말인가!


사실 더 큰 문제는 비단 아이가 한글로 자기 이름을 못쓴다는데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도 상황이 마찬가지란 것이다. 아이는 영어로 자기 이름 쓰는 것도 가끔 헷갈려한다. 한국 이름은 Yoonseo, 유치원에서 쓰는 Stella라는 이름 두 개를 가르쳤더니 Stoolla 이렇게 써놨다. 그나마 알파벳은 유치원에서도 배우고 집에서도 몇 번 큰 소리 내며 가르쳐놨더니 가끔 S와 T를 헷갈리고, B, C의 좌우를 바꿔서 쓰는 것 빼고는 곧잘 쓰는데 파닉스는 어림도 없다. "윤서야, MOM 읽어볼까? M은 '므, 므', O는 '어, 어', M은 '음, 음' 자, 이 세 개를 합치면 뭐가 되지?"라고 하면 평소에는 쉴 새 없이 짹짹 거리는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므므, 어어, 음음 합치면 멈~이잖아!"라고 하면 그제야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멈..." 따라 한다. 뒷장으로 갔다가 다시 앞장으로 넘어와서 MOM을 읽어보라고 하면 다시 꿀 먹은 벙어리 모드. 결국 난 아이를 가르치려고 책만 펴면 목소리가 커지고 얼마 안 있어 화를 내고 있다. 역시 난 누굴 가르치는데 잼병이란 결론을 내며 책을 덮어버린다.


도대체 강남의 똘똘한 아이들이 다니는 영어 유치원에서는 진작에 혼자서 한 바닥 에세이를 쓰고, 환경오염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데 어떻게 가르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몇 달 지내는 동안 영어 유치원을 보내서 미국에서 9월 킨더가든 가기 전에 영어 진도를 쭉 빼두려는 게 나의 목표였다. 하지만 현실은,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영어 유치원은 외국에서 살다가 단기로 한국 오는 애들을 받아주기는 커녕, 몇 달 전부터 무려 영재 테스트를 받고 영어 면접시험을 잘 봐야지 겨우 입학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아니 무슨 특목고도 아니고 유치원 입학인데... 시험 안 봐도 바로 등록 가능하다고 하는 몇몇 영어 유치원들이 있어 상담을 갔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그냥 '행복하고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란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보통의 숲 유치원을 보냈다. 맛있게 밥 먹고, 신나게 뛰다 오는 유치원 다니니 아이는 행복해한다.



미국에서 커가는 한국 아이들의 언어 패턴을 보면, 어릴 땐 집에서 한국말만 쓰다 보니 4살 정도까지는 완벽하게 한국말을 하다가 5살 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한국어가 어눌해진다. 특히 형제자매 있는 집들은 자기네들끼리 영어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급속도로 한국어 실력이 줄어들고 점점 불편해져서 한국말로 물어봐도 영어로 대답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부모가 한국말을 더 잘하는데 아이들이 한국말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싶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아이는 만 5살이 가까워지도록 한글로도, 영어로도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못쓴다는 현실을 깨닫자 덜컥 겁이 났다. 뭐 하나라도 얼른 마스터해야되는거 아닌가.


며칠 고민을 하다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한국어를, 그리고 다시 미국에 돌아가면 영어 파닉스를 제대로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 와서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건 왠지 수학 시간에 국어책 펴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국어를 탄탄하게 해 놓아야 외국어를 배워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언어 교육학자들의 말이 부디 맞기를 바란다. 아,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가르치며 엄마가 더 이상 화내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한글 과외 선생님을 모셔오기로 했다. 만 4살에 과외 선생님을 붙이는 게 웬 극성이냐 싶다가도, 아이와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일 것이란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글씨를 쓸 줄 알기 전에 색색가지 색연필로 자기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하고 남겼으면 좋겠는 엄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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