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다행히 우린 시카고에서 밤새 비행기를 타고 아주 이른 아침에 리스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을 어디로 잡을까 고민을 하다가 여기저기 걸어 다니기 좋을 중간 위치인 벨렘(Belem) 지구에서 지내기로 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호텔에 너무 이른 아침에 도착한 탓에 방은 받지 못했다. 대신 짐을 맡기고 스파에 가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역대급으로 좁고 딱딱했던 비행기에서 쌓였던 여독이 스르르 풀렸다. 다시 상쾌해진 기분으로 우린 하루 밖에 없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써보기로 했다. 호텔 밖으로 나와 뭔가 먹고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럴 때 리스본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에그타르트'가 있으니까!
우린 눈앞에 지나가는 버스를 무작정 잡아타고 서쪽 방향으로 향해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곳에 우리도 내리니 그곳이 바로 리스본에서 가장 유명한 에그타르트집인 Pastéis de Belém 앞이다. 십여 년 전 출장을 왔을 때도 여기에 왔었다! 간판을 보니 생각이 났다. 기자들과 함께 여기에서 뜨끈뜨끈한 에그타르트를 사 먹었던 게 아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때 이후로 어디 여행을 가거나 빵집을 가서 에그타르트를 보면 항상 그 맛이 그리워 사 먹었지만, 본고장에서의 맛은 안 났다. 그걸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에그타르트를 먹은 후에 산책을 하다 보니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과 벨렘탑이 보였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이란 이 나라가 가졌던 대단한 위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당시 해양 무역으로 패권을 거머쥐었던 포르투갈의 찬란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제노리스 수도원 건축물 곳곳에는 항해에서 사용을 했던 밧줄 무늬, 그리고 바다를 상징하는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대항해 시대 인도 항해 원정을 총 지휘했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무덤도 있다. 정확한 지도도 없고, 확신도 없는 그 넓고 두려웠을 대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용감한 탐험가의 무덤은 지금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놀라울 만큼 작았다. 용기는 크기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오전 내내 챗GPT를 돌려가며 역사 공부를 한 뒤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다시 현실 세계에서의 휴식이 필요했다. 우린 리스본에서 요즘 가장 핫한 동네인 LX 팩토리에 가기로 했다. 서울의 성수동처럼 옛 공장 부지를 힙하게 만들어 아트센터, 레스토랑, 카페, 책방 등을 만들어놓은 곳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한 장면을 만나게 됐다.
난 새로운 도시를 가면 그 동네의 책방을 가는 걸 좋아한다.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동네 책방이 주는 분위기와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일반 매장에서 봤더라면 이성적인 판단으로 절대 안 살 것 같은 필기류나, 노트도, 괜히 책방에 있으면 한 번 더 관심이 가고 갖고 싶어진다. 이곳에는 Livraria Ler Devagar란 이름의 책방이 있다. 포르투칼어로 '느리게 읽는 서점'이란다. 역시 이름부터 마음에 든다.
찬찬히 서점을 둘러보니 이곳은 아마도 예전에 재봉틀 공장이었나 보다. 군데군데 그때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리스본의 노란 전차 미니어처. 뭔지 궁금해서 한참을 바라보니, 한 친절한 직원이 슬며시 다가온다. "이거 뭔지 내가 보여줄까?" 이 노란 전차 때문에 내가 리스본에 왔는데, 당연히 'Yes!' 아저씨가 건네준 헤드셋을 켜고 작은 구멍으로 트램 안을 보았다. 그 작디작은 공간은, 환상적인 무대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포르투갈 전통 기타로 연주하는 파두에 맞춰 짧은 연극이 시작됐다. 아저씨가 직접 손가락 인형으로 쇼를 펼쳐줬다. 그 순간, 너무 행복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곳 리스본에 온 이유. 28번 노란 전차를 탔다. 워낙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노선이라 그런지 거의 한 시간을 땡볕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빈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는 많이 지쳐있었지만, 역시 노란 전차의 매력은 그 기다림의 충분한 가치를 느끼게 해 줬다. 이렇게 빨리, 아슬아슬하게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리스본의 꼬불꼬불 언덕을 오르내리던 전차를 타고 있으니, 옛날, 이 전차를 처음 타고 놀라워했던 30대 초반의 나와,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의 나 사이의 시간이 휘리릭 지나갔다. 시작점에서 종점까지 도착한 우리는 이렇게 끝내기 아쉬워서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 시작점까지 한 번 더 전차를 탔다.
덜컹덜컹 달리던 전차 소리,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느껴졌던 리스본의 뜨겁고 시원한 바람이 그립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두 아이들을 데리고 리스본은 다시 꼭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