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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ul 11. 2017

이민자 할아버지의 작은 한글 도서관

시카고 느티나무 도서관

2년 전, 그러니까 남편이 처음으로 대학원 입학을 위해 시카고에 올 때 저희는 이민 가방이 터져라 바리바리 싸왔습니다. 온갖 종류의 살림살이 도구는 물론 고추장, 된장, 간장, 라면, 각종 젓갈까지, 적어도 1년 동안은 한국에 나오지 않아도 한국 음식을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싸왔었죠. 그런데 여기 와보니 서울 우리 동네에 에 있는 슈퍼마켓보다 훨씬 더 큰 H Mart가 있었어요. 간장 종류만 해도 한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각종 브랜드들이 다 들어와 있었고, 쑥갓이나 대파 같은 한국 야채, 홍시, 배 같은 한국 과일도 구입할 수 있었지요. 먹고사는 건 전혀 걱정할 것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대신 여기 생활에 한 가지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 책이었지요. 아기를 키우면서 여기서 제가 유일하게 몰입할 수 있는 있는 시간이 바로 책 보는 시간이거든요.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잠깐 혼자서 놀 때나 그런 짬에 말입니다. 요즘에는 물론 알라딘이나 인터파크 US 같은 인터넷 서점이 잘 되어 있어서 한국의 신간이나 오래된 책들도 쉽게 구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기서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되기 때문에 보고 싶은 책들을 한국에서 처럼 마음껏 사서 마냥 쌓아둘 수만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래서 한 번 보고 두 번은 안 보게 되는 소설책 같은 것은 잘 사지 않게 되지요.


아이가 꾸벅꾸벅 낮잠을 자기 시작하면 꿀맛같은 잠깐의 휴식시간


그러던 중에 인터넷 서칭을 하다가 정말 보석 같은 곳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시카고의 북쪽 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도서관이라는 한국 도서관이었지요. 저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긴 했어도 한국 책을 마음껏 빌릴 수 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느티나무 도서관은 규모는 아담하지만 할아버지 관장님이 책 선별을 정말 잘해 놓으셔서 쓸데없는 책들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예전 기사를 좀 찾아보니 이 분이 미국 이민을 오신지 거의 50년 되신 분인데 여기서 공무원 생활 은퇴 후에 자원봉사로 도서관을 운영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전 시카고 샴버그 지역 도서관에 한국어 책 코너를 만드는데 앞장서시다가 그 코너가 안타깝게도 규모를 대폭 줄여 모두 폐기처분 상황에 놓이자 그 책들을 모두 가지고 나오셔서 이런 멋진 한국어 책 도서관을 만드신 것이지요.



책은 한 번에 10권씩, 총 3주를 빌릴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두 무료로 운영된다는 것이지요. 관장님과 그 주변 지인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 이해인 수녀님, 김훈 작가 등의 아주 오래된 초판본들도 있어서 반가웠지요. 만약 한국에 있는 도서관이었다면 빌려보는 사람도 많아 손때가 타고 이미 너무 옛날 책들은 버려졌을 텐데 이 곳은 마치 타임캡슐 안에 있던 책처럼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어요. 심지어 제가 초등학교 때 빠져있던 2,500원 정가의 애거서 크리스티 문고판도 새 책처럼 꽂혀있어 너무 반가웠답니다.



아이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잠을 자는데 한 번 잘 때마다 한 시간 반 정도씩 꿈나라에 다녀옵니다. 아이 낮잠 재우기에 성공을 하면 전 즐거운 마음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모카 포트에 에스프레소를 내려 맛있는 커피를 만듭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인 창 밖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지요. 아이가 다시 에엥~!하고 울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 시간이 제겐 이 곳 생활에서 유일하게 한 숨 돌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지요.

 


지난 주말에는 이 곳에 제가 한국에서 가져온 육아, 소설책 중에 더 이상 보지 않는 것들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쌓아두기보다 책을 좋아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눠본다면 좋은 일이니까요. 제 시카고 라이프의 작은 오아시스 같은 이 느티나무 도서관이 오래오래 문을 열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또 비슷한 또래들과 북클럽이나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가 한글을 배우면 이 곳에 와서 엄마랑 같이 책도 읽고 하면 정말 좋겠지요? 




느티나무 도서관: 

515 E Golf Rd #100, Arlington Heights, IL 60005, USA

630-390-5927 

오전 10시 - 4시 (월, 화, 목, 금, 토 운영) 


관련 콘텐츠: 

[국립중앙도서관 블로그] 시카고 느티나무 도서관과 시카고 한인 문화 도서관 

http://dibrary1004.blog.me/220165198548 


[미주 중앙일보] 느티나무 도서관을 아시나요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469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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