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소원을 빌었던 게 언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생일초를 끄기 전에 소원을 빌기도 하고 어떤 소원이 있는지 질문을 많이 받곤 한다.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을수록 소원을 비는 일은 줄어든다. 마치 꿈이나 장래희망을 더 이상 묻고 답하지 않는 것처럼.
그럼 어릴 때 내 소원은 뭐였을까. 장래희망이나 꿈은 대강 생각이 나는데 소원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소원만은 빌지 않았던 게 기억난다.
내 장애를 고쳐주세요. 걷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
나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가가 그랬고 학교 선생님들이 그랬다. 그래서 전도도 많이 받았고 날 위해 기도 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또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그럼 다 들어주신다고.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런 기도는 나에게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처럼 느껴졌다. 기도든, 소원이든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내 장애에 대해선 낫게 해달라고 바란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장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은 많이 했지만 그게 소원이나 꿈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난 내 장애가 비장애인처럼 완전히 고쳐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어릴 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평생 내가 가자고 가야 할 것, 그냥 내 몸 그 자체일 뿐.
대신 나는 몸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거나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아프면 빨리 낫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이 정확히 어떤 건지 몰랐다가 마음과 머리를 번쩍이게 만든 책을 읽었다. 김원영작가와 김초엽작가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이다. 각자 장애를 가진 두 작가가 인간의 몸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 책이다.
내가 인상 깊게 본 부분은 장애가 없는 완전한 몸이 아니라, 장애가 있음에도 과학기술로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다.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조화로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그건 30대 후반이 된 내가 살면서 바라온 것들이었다. 장애가 없다면 좋았겠지만 장애인인 내가 원하는 건 장애를 없애달라는 허무맹랑한 소원이 아닌, 장애가 있음에도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은 내 몸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이 늘어나지 않을까?
나에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