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내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 장애로 인한 당연한 추측일 테지만 정작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어려웠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세상이기에 내 장애는 내 전부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니 내 이야기도 그 장애를 중심으로 이야기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항상 이겨내야 하고, 역경을 견디는 그런 이야기들.
그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그런 글을 안 써본 건 아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 몇 번 도전했었고 난 그때마다 내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참 어렵더라.
글을 쓸때마다 나는 내 장애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했다. 희귀장애에 속한 나는 머릿속에서 흐릿해진 장애명도 찾아봐야 했다. 평소엔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을 의식해야 했다. 그러니 우울하기만 하고 애써 쓴 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해야 행복하니까 다른 이야기를 썼다. 소설창작 수업에서 단편을 처음 썼을 때 재밌었던 것처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는 통하지 않았지만 내가 쓴 단편은 장애인 문학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이제는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쓰고 싶어졌다.
갑자기, 왜?
기록하고 싶어졌다.
일기도 안 쓰는 나니까. 내 일상과 여태 해온 일들은 모두 내 기억에만 있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다음은 답답하고 문득문득 화가 나서였다.
세상은 분명 좋아지고 있고 어마어마한 기술 발전으로 편해지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여전히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배달 앱으로 못 시켜 먹는 음식이 없고, 핸드폰으로 은행에 가지 않아도 업무를 볼 수 있지만, 여전히 턱 하나로 못 가는 곳이 많다.
매년 인도를 갈아엎고 도로공사를 하지만 휠체어가 가는 길은 항상 쉽지 않다.
사람들 편하라며 모든 게 자동화되지만 정작 휠체어에 탄 나는 키오스크에 손이 닿지 않는다.
정말 세상은 사람들을 위해 발전하고 있는 게 맞을까?
마치 투명인간 같았다. 분명 세상은 발전하고 다양성이 강조되는데 아직도 장애인은 소수의 약자였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인 다양성에는 끼지 못한 채였다.
고작 키오스크 때문에.
고작 턱 하나 때문에.
그래서 화 한번 내고 말 게 아니라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남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일상은, 장애인이라고 해도 사는 게 다 비슷하다는 거니까
남들이 겪지 않을 일들은, 장애가 있기에 이런 일들이 있다고 쓸 수 있으니까.
별거 아닌 별거 같은 일상을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