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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Feb 27. 2017

11. 결혼반지, 그리고 결혼 편지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공부든 알바든 학군단 생활이든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대학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일은 결혼이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다른 대학을 졸업한 후 영문학 학위가 필요해서 다시 편입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쌍꺼풀이 있는 큰 눈에 아랫입술이 도톰한 계란형 얼굴을 가진 깡마른 아가씨였습니다. 집이 학교에서 가까워서 점심을 먹으러 자주 갔었는데, 그러다가 정이 들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취업에 성공한 저는 이제 취업을 했으니 결혼을 하고 그렇게 단계적으로 살아가면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 아기가 생겼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결혼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대학 때도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 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누가 펑크를 내면 대신 땜빵을 몇 번 해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 차 한잔 마실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우리 집 형편이 안 좋은데 뭘 어떻게 하나’하는 답답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혼반지를 사는 것도 그랬습니다.    


잠실에 있는 백화점을 둘러보니 작지만 진짜인 다이아몬드 반지가 50만 원이었습니다. 그걸 사고 싶었지만 저에겐 그 50만 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대학 친구가 고등학교 동생의 과외를 부탁했습니다. 대입 시험이 코앞이라서 한 달 동안 매일 과외를 하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과외비가 딱 50만 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저는 결혼반지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한 달 과외비가 보통 20만 원 정도였기에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게 마냥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아기가 생기고, 군대도 가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 본 경험이 없어 부담도 컸기에 저에겐 어떻게든 해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왜 그리 걱정이 많았을까, 왜 그렇게 있는 걱정, 없는 걱정을 일부러 만들며 살았을까 싶습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항상 걱정만 하며 불안에 떨며 살아서 그런 걸까요? 아내는 임신을 기뻐했고 매우 희망차 보였는데, 저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맘이 무거웠습니다. 그게 아내 눈에는 좋지 않게 보였을 겁니다. 듬직한 바위처럼 믿음을 줘야 했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문제 등 몇몇 난관이 있었습니다. 혼인 신고를 하러 근처 동사무소를 찾아가니 본적지에 있는 동사무소로 가야 한다고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본적지는 강원도 양양의 산골이었고 당시 우리는 직접 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필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고 본적지 동사무소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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