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가설
그런데 서양나라 사람들의 발표방식은 달랐다. 그들은 내용의 구조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좁은 범위의 구체적인 내용일지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넓은 범위의 상위의 내용과 같은 수준의 단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에 포함되는 순서도 구조적인 것보다, 이야기가 되는 순서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발표자료를 읽거나 발표를 듣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전체 구조에서 어디에 포함되어 있는지 모를 때가 많고 그래서 듣고 나면 내용이 머리에 남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나중에 알아낸 사실은, 나와 같은 한국인들은 어떤 사물이나 내용을 파악할 때 그것이 속한 환경과 구조를 먼저 보고 그것에서 상대적인 관계로서 주제가 되는 사물이나 내용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배경설명이나 전체 얼게속에서의 상관관계없이 본론을 얘기하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반면 서양나라 사람들은 관심과 본론이 이야기되는 대상에 있고,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있더라도 그것이 속한 상위구조 속에서 그것들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각 관심내용 자체를 순차적으로 파악해 나간다. 그것들의 전체적 상관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서론에 단원구성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이 그리 유용하지는 않다. 오히려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자체의 순차적 연결이 그들이 그 내용을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연결요소이다.
좀 일반화시켜서 동양인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체적인 구조에서 인지할 수 있도록 한 번에 전달하려고 하는 반면 서양인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쪼개서 순차적으로 연결시켜 전달하여 마지막에 듣는 사람이 전체적인 구조로 조합하도록 한다.
언어의 구조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어는 주어와 목적어가 먼저 나타나서 전체적인 관계를 보여준 후 다름에 그 둘 사이에 일어나는 동작이 나온다. 영어는 주어, 동사가 나오고 나서 마지막에 전체적인 관계를 알 수 있는 목적어가 나온다.
문자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한, 중, 일의 문자는 하나의 의미가 하나의 캐릭터로 모여있다. 각 알파벳들의 상관관계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재빠르게 인지할 수 있다. 영어는 알파벳들의 상관관계는 앞뒤 순서적 나열 밖에 없다.
약간 다르게 얘기하면, 동양인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전체를 조합하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구조를 만들어 한번에 전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서양인은 자신의 입장에서 전체를 조합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을 차례로 얘기하려고 상대가 전체의 구조를 조합해서 이해하도록 내 벼려두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치 동양의 식당에서 요리사가 요리를 한 번에 차려내서 먹게 하고 먹는 사람이 재료의 조합을 디자인할 필요 없이 더 이상 손댈 필요 없는 완성된 요리를 내놓는데 반해 서양의 식당에서는 요리가 한 번에 하나씩 나오면서 먹는 사람이 순차적으로 먹도록하고 요리의 재료의 최종 조합은 먹는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서양인 친구에게 무엇을 설명하려면 구조적 전달보다 선형적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얘기하고자 하는 본론들의 배경, 구조, 관계설명을 먼저 하면 그들은 지나치게 친절한 - 오히려 아이에게 설명하는 듯한 - 행동으로 여길 수도 있고 실체가 아닌 그것들의 상관관계, 그것을 둘러싼 구조, 상위의 추상적 개념을 먼저 얘기하면 그것을 제대로 인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바로 구체적인 내용을 사용하여 시간순, 인과순과 같은 선형적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는 게 더욱 빨리 이해시키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