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어떤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틀짜리인데 학생은 나까지 6명.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둘이었고, 나머지는 그나마 젊어 보였다.
그중 한 친구는 얼굴이 한 서른 중반에서 말쯤 되어 보였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내가 아는 친구들의 액면가가 우리보다 보통 높아 보이는 걸 감안해서 서른 초에서 중반까지가 아닐까 했다.
물론 나이가 어리니 여기서 '친구'라고 부를 뿐 친구는 아니다.
어쩌다 그 친구와 서로 얘기하다가 그 친구가 갑자기 나의 나이를 묻는다....
이럴 때가 나는 참 재미있다.
"맞춰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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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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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올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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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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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써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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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마흔은 아니겠지..... 요"
(물론 영어로 그런 높임말은 없다. 그냥 한국인이었으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다는 말)
난, 쉰이 넘었다.
어떻게 20년이나 나이를 틀릴게 볼 수가 있지?
우린 나이를 '먹는다'. 마치 새해에 떡국을 먹듯이 나이를 먹는 것이다.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라는 말 뒤에는 나이는 먹을수록 좋은 것이니 떡국을 먹어서 나이도 같이 먹으라는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나이를 모든 사람이 한날한시에 먹게 된다. 이 사실이 우리를 젊어 보이게 만드는 기본 원리와 관계있다.
한 살, 두 살 이렇게 부를 때 '살'은 나이를 뜻하지만 살아온 해수의 총합의 의미가 아니라 몇 번째 해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12살을 부를 때 '십이 살'이 아닌 '열두 번째 살이'를 뜻하는 '열두 살'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매해 새로운 삶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는 거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새 삶을 시작한다. 이것이 윤회사상과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보다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뚜렷한 사계절의 영향을 받는 쌀농사 사이클과의 관련이다.
우리는 나이 많은 어른, 선생님을 존경하도록 교육받았다. 나이가 한 두 살이라도 많은 사람은 적어도 언어적으로 존댓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수십 년간의 농사경험이 매우 중요한 지적자산이던 우리에게 그런 자산을 보유한 어른과 노인들 존경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과정은 당시에 유용했던 그런 지적자산을 키워가면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적자산이 왜 1년 단위로 증가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사계절을 다 경험해봐야 한 사이클 지나는 것이고 한 번의 쌀농사를 경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한 번의 사이클이 지나면서 농사의 지혜, 삶의 지혜가 쌓인다고 보는 것이다. 태어나서 혹독한 겨울과 보릿고개를 경험해 봐야 드디어 작은 한 바퀴의 삶을 살아 본 것이 된다. 이렇게 한 사이클의 삶, 또 한 사이클의 삶을 반복하면서 인생의 달고 쓴맛을 경험하고 쓸모 있는 '지혜'를 쌓아 존경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의 나이는 늙어가는 게 아니라 더 존경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나이에 민감하다. 그래서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나의 어른 보다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이미 성인임에도 담배도 술도 어른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수 없다. 80번의 인생 싸이클로 지혜를 쌓아 올린 80대의 부모 앞에서 50대의 자식은 매우 겸손해야 하며, 부모와 동일한 권한을 누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모보다 부지런해야 하며, 부모 앞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실 수 없고, 더 경건해야 하며, 더 건강해야 한다. 심지어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수염을 없애서 보모보다 더 어려 보여야 한다. 우리의 세상은 항상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겸손이 미덕일 수밖에 없다.
다시 나에게 나이를 물었던 친구 얘기로 돌아가자.
그 친구는 나이를 '30 years old'라고 부른다. '30th year life'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30은 살아온 해의 총합이고 그만큼 '낡았다' 또는 '늙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서양인은 직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어떤 싸이클로 반복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각자는 태어나서 각자의 삶을 시작했다가 각자의 삶을 언젠가는 끝내는 것이다. 마치 서양인의 파티에서 특정 시작시간에 동시에 모인다는, 또는 끝나는 시점에 동시에 파하는 개념이 없는 것과 같다. 그냥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옆의 친구와 속도를 맞출 필요가 없고 인생의 길고 짧은 상대적 개념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서양인들에게 인생은 각자의 갈길이며, 남들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고 남들 경험을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한국인들보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경험을 시간의 사이클 횟수인 나이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경험이란 순수히 자신의 경험이므로 나이라는 객관적 시간과 남들의 사이클을 맞추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부모와도 개별인 인생을 살게 된다. 법적으로 성인 취급을 받는 18세가 되면 대부분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 곁을 떠난다. 이미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지혜를 전해 내려줄 어른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한 것만 지혜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남들과의 나이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자신이 가지지 않은 지혜를 가졌다면 그 지혜는 그를 존경하여 내려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전하고 경험해서 본인의 것으로 쟁취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얻은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한 살이라도 더 젊은 사람으로 유지하기 위한 동기는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적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한 나이를 더 먹은 후에 해도 되는 것들을 일찍 경험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어떤 것이 나쁘다고 어른이 얘기해도 그들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그것을 누군가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면, 내려준 것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본인이 이성적으로 도달한 결론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면, 그냥 그 어른이 자신의 생존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냥 마지못해 포기한 것일 뿐일 것이다.
한국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후회하게 되거나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유행이 금방 지날 문양의 문신도 그들을 결국 해보고 그 결과를 경험해봐야 하며, 줄이 끊어져 물에 빠질 수도 있는 번지점프도 직접 해봐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전적이게 되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최종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낳던, 나쁜 결과를 낳던.
그렇게 직선적으로 인생을 살게 되면 더 다양한 경험을 빠르게 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직접 경험한 것이 자신이 믿는 대부분이 되며 자신감도 매우 높게 된다. 어른들로부터 지혜를 물려받기와 같이 간접적으로 배운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나더라도 서양 친구들은 자신의 직접경험으로 알게 된 것에 매우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것들을 별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서 직접 경험한 것들만이 자신의 세상을 이루는 요소가 되어간다. 그들에게 있어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몸소 발견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 친구의 얼굴이 실제 생물학적 나이에 비해 더 낡아 보이는 이유가 단지 이들이 나이를 'years old'라고 부르기 때문이라고 하면 억측이 될 것이다. 그 보다 인생을 그렇게 일방통행 길로 빠르게 편도여행하는 개인의 삶이라고 바라보게 하는 태도가 나이 먹어감을 그렇게 '늙어감'으로 표현하게도 만들고 실제로 그들 주변의 세상을 탐험하고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생활태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더 도전적이고, 개인적이며, 물질적 경험적일 수 있고 그래서 더 많은 물질문명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당장 서양인 한 세대가 같은 경제 수준의 동양인 한 세대보다 짧더라도 동일한 시간 안에 인생을 더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사는 것은 그들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서양친구가 좀 아니 들어 보인다고 핀잔을 줄필요는 없다. 난 그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그래, 너도 참 나만큼 고생 많았겠구나. 세상 모든 걸 꼭 다 경험해 볼 필요는 없잖아. 이제 편하게 살아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