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이야기
한국에서 일할 때도 할로윈은 TV에나 나오는 미국의 문화였고 사무실에 기괴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직원을 본 적도 없다.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첫 직장을 구한 바로 다음 달이 10월이었다. 여긴 10월이면 우중충한 날씨에 일만 집중하던 겨울을 통과하고 이제 계절이 여름으로 가는 활기가 생기는 계절이다. 사무실은( 휴가 계획 얘기 등으로...) 잡담으로 가득하고 곧 있을 할로윈에 분장할 아이디어를 서로 얘기하기도 한다.
10월 중순부터 사무실은 거미줄, 유령, 눈알 수프등으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신성한 사무실에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직원들이 모두들 어떻게 분장할 건지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은근히 peer pressure (동료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았다.
INTJ 성격의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집단행동이지만 그 '동료압박' 때문에 전날 부랴부랴 코스튬 가게에 들러 재빨리 흰색 종이 가면 하나를 샀다. 무엇 보다 외국노동자로서 이들 문화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거다. 그 가면에 조커와 같은 광대분장이 되게 색을 어설프게 칠해놓았다. '이 어색함이란'. 가면이 어색한 게 아니라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어색했다.
할로윈 당일 아침, 난 가면을 가방에 챙겨 넣고 출근을 했다. 버스에 탄 사람 중에 드라큘라 같은 분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온한 아침 사무실에 도착한다. 헉, 정신병원에 들어온 줄 않았다.
흰색작업복에 끈적한 피를 온통 묻히고 걸어 다니는 직원, 얼굴부터 초록색인 엘프 복장의 직원, 당연히 슈퍼맨 같은 히어로들은 널려있었고 그중에서는 허접한 싸구려 분장이 아닌 어디서 수입했는지 매우 그럴싸 해보이는 '고급형' 캡틴 아메리카 복장도 있었다. 내 매니저, 키가 작은 편지만 탄탄한 몸매에 늘 근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그는 알 수 없는 쫄쫄이 복장에 들어가 레슬링 선수 복면을 쓰고 있었다. 물론 목소리와 몸매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흠.
더군다나 재미있는 것은 하루 종일 이런 복장으로 직원들은 평소와 같이 일하고, 미팅하고, 심각한 주제를 토론한다. '아 이 적응 안 되는 상황이란...'. 전체 직원 미팅(그 달의 주요 실적이나 이벤트를 공지하는 행사)에 제너널 매니저가 속은 붉고 겉은 검은 망토에 빨간 뿔과 삼지창을 들고 나와 주요 실적을 발표하고 직원들은 평소와 같이 얘기를 등고 박수를 치고 한다. 복장만 다를 뿐이다. 물론 일부는 나같이 아무런 코스튬을 하지 않은 직원도 있다. 주로 아시아, 인도계 직원들이다.
그날 난 끝내 나의 소박한 광대 가면을 가방에서 꺼내 놓지 못했다.
이들은 왜 이런 것에 목숨 걸까?
INTJ 성격상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개인화된 서구에서는 (특히 미국) 아시안과 다르게 집단적인 사고나 행동을 주체성 없는 어떤 추구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타인을 포함한 환경을 개척하고 바꾸어나가는 게 인간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커플룩 같은 건 없다. 자신과 가족의 사생활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누군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고 일과 개인의 생활을 분명히 구분하고 싶어 한다.
한국인은 일이 우선이며 일하지 않는 시간이 가족을 위한 시간인 반면, 이들은 가족과 개인의 시간이 우선이고 그렇지 않은 시간에 일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개인화될수록 다른 곳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 년 내내 개인적인 삶을 살다가 이런 행사가 있으면 드레스 코드를 정한다거나 하면서 집단행동을 하는 것으로 색다른 재미를 느낀다.
난 이미 한국에서 살면서 이런 집단적인 행동을 많이 겪었다. 그게 정말 싫었다. 신입생환영회, 회식, 엠티, 단합회 이런 것들은 정말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다. 왜 그런 걸 해야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지. 난 그런 거 안 해도 일에 집중하고 동료들과 친하고 문제없이 지내는데 말이다.
남들이 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재미를 못 느끼는 INTJ는 이번 할로윈이 또 얼마나 어설플까 미리 예상해 본다. 주말에 덜 허접한 마법사 모자라도 하나 사놔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