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상 Dec 16. 2019

바로 사건으로

에세이를 쓰자

다른 사람의 글도 인용하면서 ‘에세이를 쓰자’를 말하면 좋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제 글만 씹고 뜯으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사건으로’입니다. 


에세이는 참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활 에세이, 여행 에세이, 특정한 소재 에세이 등등……. 그래서 특별한 형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만, 편집자로서 일하는 제 기준을 말씀 드린다는 데서 의의를 찾으면 되겠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출판사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 앞으로 적어도 매일 한 개, 많은 날은 다섯 개 정도까지 원고 투고가 들어옵니다.


앞서 말했듯이 특이한 소재를 풀어낸 원고라고 해야 그때부터 본문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한테도 ‘일’이란 게 있는지라 본문 전체를 모두 읽지 못합니다. 시작 부분 몇 페이지를 보고 더 읽어야 하는지 마는지를 결정합니다. 하루 하나의 투고만 있다 하더라도, 원고 전체를 읽는 것은 매일 책 한 권을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그것도 제 일을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말씀 드리는 게 감성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글보다 사건을 묘사하는 글을 앞에 배치하라는 것입니다. 저(편집자)와 저자(투고자)는 글로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누구인지 안물안궁인 점도 있지만, 저자의 감정이 어떠한지 느낄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감정은 서로 동화되는 과정이 있어야 공감하지만, 사건은 스토리만 좇으면 되기 때문에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아니, 공감하지 않더라도 잘 읽힌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결국 소스 맛》으로 들어가 볼까요?

전 첫 번째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카레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어떤 감상 같은 단계는 뛰어넘고 카레 이야기라는 결론을 주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부터 제 결혼생활 스토리가 짧게 나오죠. 사건의 묘사와 서술을 먼저 했습니다. 

음식 하나 제대로 못하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는 누구나 따라 가기 쉬운 스토리입니다. 요리를 하나도 못하던 사람이 처음 카레로 뭔가 만들어본 이야기까지 마친 다음에야 카레의 기원과 제 감상을 말했습니다.   

   

이 글이 반대가 되었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지루한 설명문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세상에 카레를 모르는 사람이란 없을 테니, 평범하게 느낌을 주었을 테고, 결국 출간되지 못했겠죠.     


또 어떤 투고를 보면 감정 과잉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자유라기보다 어둠이고,
해갈이라기보다 눈물이다.
내 유년의 뒷모습이고,
청년의 온도이다.  


이렇게 시처럼 시작하는 투고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위의 글은 실제 투고가 아니라 제가 지금 지어낸 것입니다). 시란 시인의 상황과 시대상까지 알아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그런데 초면인 편집자가 그것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시처럼 감성적인 에세이는 나중에 유명 작가가 된 후에 시도하시기 바랍니다(잔인한가요? 현실입니다).    

 

곧 터질 폭탄이 무섭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작가의 이전글 그럼에도 당신이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