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사실 안 레벨업

by 은상

1화에서 ‘출판 경력 20년 이상’은 오히려 웹툰 소설가가 되려는 나에게는 장애 요인이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출판 경력 20년이 장점이 되는 분야가 있다.

인맥이다.

나에게도 웹소설 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 웹소설을 좀 써보려고 하는데….”

조금 쑥스럽게 말했는데, 친구는 흔쾌히 ‘한번 써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추천한 장르가 ‘헌터물’이었다.

헌터물을 써오면 그 친구의 회사에서 검토를 해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내가 헌터물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 써보겠다’고 하고, 헌터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인, 《나 혼자만 레벨업》을 읽었다. 물론 몇백 화나 되는 소설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대략 누군가 각성을 해서 초능력을 얻는데 이들을 헌터라고 부르고, 헌터는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여기서 얻는 마정석과 아이템으로 부자가 되든지 레벨업을 하든지 한다는 그런 내용이군.’

여기까지 파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웹소설을 얕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소설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었고 즐길 수 없었다.

그저 웹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파악하려고만 들었다.

그런 마음가짐이니, 소설이 재미가 없었다.

웹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없다!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패착이었다.

내가 재미가 없는데, 누가 내 글을 재미있게 읽어줄까?

사실 이런 깨달음은 몇 개월 후에 찾아온 것이니, 이 시점에서는 그저 헌터물을 쓰는데 급급했다.

헌터물의 기본 골격만 갖춘 채 난 또다시 《듄⟫을 쓰기 시작했다.

웹소설은 한 회당 5000자가 기본이다.

5000자가 처음에는 부담이었지만, 쓰다 보니 재미있었다.

이틀 만에 난 총 5화 분량 25000자, 원고지로는 약 130매 분량의 원고를 완성했다. 단편소설 하나 분량이 넘는다.

뿌듯했다.

‘내가 쓸 줄 아는구나.’

자만했다.

내가 쓴 건 웹소설이 아니라 《듄》이었는데….

아래는 내가 처음으로 쓴 웹소설 가칭 《폐급 헌터》의 도입부다.

(제목이 매우 중요한데 이때는 그것도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0. 권력


무엇인가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일반적인 것으로, 그럴 만한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비난이 아니라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그래, 나는 칭찬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그러니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해. 어떻게 하든!


1. 지진


“대장, 지진이에요!”

연락책 꼬마가 뛰어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던전은 열렸어?”

마영민이 묻자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20인 헌터 파티를 이끌고 있는 영민은 파티원들에게 소리쳤다.

“자, 출동이다!”

파티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길드에 먼저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꼬마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가는 게 임자지. 선출동 후보고다. 우리가 출동하고 나면 넌 길드로 가서 보고해. 알았지?”

울상이 된 꼬마를 뒤에 남기고 영민 파티는 장비를 둘러메고 일어섰다.

길드에 일일이 보고하고 가려면 저걸 살 까닭이 없었다.

파티 사무실 앞에는 위용도 당당하게 말 20마리가 서 있었다.

먹이고 재우는 데만도 한 마리당 한 달에 30만 원은 족히 잡아먹는 녀석을 20마리나 데리고 있으니 월 600만 원이나 유지비가 나간다.

그런데도 말을 데리고 있는 이유는 던전이 열렸을 때 누구보다 빨리 가려는 것이다.

다른 팀이 길드의 허가를 받고 왔다고 하더라도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작업을 시작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

나중에라도 길드에 제대로 신고하고 분배만 제대로 하면 다들 그냥 넘어가 주었다.

물론 말을 20마리나 키운다는 건 영민의 입장에서 무리가 따르는 대규모 투자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꼬마가 길드 출장소로 달리고 있을 때, 20마리의 말은 편자에서 불꽃을 튀기며 지진이 발생한 장소로 달렸다.


영민은 지진 탓에 갈라진 틈을 바라보았다. 아래쪽은 깊은 어둠이었다. 깊은 어둠은 영민의 파티에게는 기회였다. 던전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니까 말이다.

“자, 말은 잘 매 두고 아래로 줄사다리를 내리자.”

전투망치를 사용하는 브레이커(breaker)들이 바닥에 말뚝을 여러 개 박았다.

여기에 말을 매두기도 하고, 줄사다리를 지지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말뚝 박기는 던전으로 내려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말뚝을 다 박자 이번에는 홀더(holder)들이 나섰다. 줄을 사용하는 일을 담당하는 홀더들은 줄사다리를 아래로 내렸고, 자신들은 로프 하나만 걸더니 그걸 타고 빠르게 틈 사이로 내려갔다.

이렇게 먼저 로프를 타고 내려가버리기 때문에 보통 척후 임무는 홀더가 맡는다.

영민은 줄사다리를 타고 몇 분 정도 내려가다가 소리쳤다.

“모두 발 조심해! 여기서 떨어지면 정말 개죽음이다.”

영민은 ‘개죽음’이란 말이 어디서 왔는지 잠깐 생각했다. 개들은 친근한 짐승일 뿐인데 왜 쓸데없는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했을까?

“대장 아래!”

바로 위에서 내려오던 호영이 말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호영은 영민의 팀에서 시커(seeker)를 맡고 있다. 덩치도 작고 유일한 십 대라 영민은 호영을 귀여워한다.




자, 어떤 세계인지 바로 이해가 되는가?

예상했겠지만, 이 야심작(!)은 보기 좋게 친구에게 까였다.

친구고 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허세에 찌들어 쓸데없는 설정을 넣은 것 몇 가지를 말해보겠다. 위에 올린 앞부분에만 나오는 설정이 이만큼이다.


1.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이다.

2. 이 세계는 ‘더스트’라는 미지의 물질이 세상을 덮어버려 고대 문명(현재 문명)은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다.

3. 이 작품에서 헌터란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진 곳(게이트라고 부른다)으로 내려가 고대 건물(던전이라 부른다)에서 쓸만한 아이템을 케오는 존재다.

4. 헌터들은 슬레이어, 시커, 홀더, 브레이커 등 역할이 정해져 있다.

5. 말발굽에서 불꽃이 튀는 걸로 알겠지만, 더스트는 일반적인 물질이 아니다.


시작하자마자 독자를 이해시켜야 하는 설정이 이만큼이었다.

진행하면 할수록 새로운 설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난 혼자 《듄》을 쓰고 있었고 친구마저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 실수를 반복한다.

‘나 혼자만 웹소설 레벨업’이 안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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