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노바를 처음 본 것은 예술영화 이론 수업에서였다. 돋보기안경을 쓴 교수는 무성 실험영화를 틀어준 뒤, 수업 전에 읽어오라고 했던 논문과 연관 지어서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줬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몸통을 돌린 후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는데 그가 노바였다. 첫인사부터 어떤 경계도 선이 없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지나치게 가까이 들이댔고, 시선을 너무 오랫동안 피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친근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안 사람처럼 어떤 낯섦도 거부감도 없는 인사에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게다가 그는 논문도 읽어오지 않았을뿐더러 토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철학과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너는 인생의 철학이 뭐라고 생각해? 그런 질문들을 퍼부었던 것 같고, 그의 옆자리에 앉은 어린 여학생이 그 말에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한심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옆사람과 수다를 떨 동안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토론 그룹에 참여를 했다. 교수가 나중에 다가와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책을 읽어오지 않았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시인했다. 말을 하다 보니 더 중요한 인생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허세스럽고 무책임해 보였다. 부주의하고 정돈되지 않은 그의 말과 외모와 표정. 기피하고 싶은 마음만이 들었다. 예술영화에 관심이 없다면 도대체 여기 왜 앉아있는지. 첫 수업부터 리딩을 안 해오는 것은 얼마나 안일한지. 그러면 지금이라도 읽지, 수업에 주어진 토론시간에 옆자리 여학생과 철학을 가장한 잡담은 왜 하는지. 그런 불만인 것은 핑계였는 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은 친숙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한테서 느껴본 적이 있는 찐득함. 거리가 없는 가까움.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선이 없는, 그래서 상대에게도 그 정도의 친밀감과 열린 마음을 요구하는 그런 사람들을 나는 알았다. 그들의 공통된 속성인 무제한적인 사랑과 바닥나지 않는 친절 같은 것은 늘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중학교 때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수린과 혜선. 수린은 언제나 철저하게 선을 긋는 아이였고, 혜선은 늘 선을 넘어오는 아이였다. 혜선은 같은 빨대를 이용하거나 같이 팥빙수를 나눠먹는 것을 꺼려하는 나를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내 음료수를 입을 대고 마시거나, 자신이 핥던 사탕을 먹으라며 놀렸다. 그 모습을 나는 소스라치도록 싫어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는 혜선이 불편하면서도 늘 그녀에게는 어떤 것도 포장하지 않고 나의 속마음과 상태를 전부 다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가 결코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주 같이 밤을 새우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우울과 어두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상한 상상들. 지질한 감정들. 누구에게도 시인하지 않을 콤플렉스 같은 것들. 그 후 수년간 다른 도시에서 살며 연락이 끊겼도, 우리는 다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제 만난 사이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노바는 나에게 다시 인사를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눴지만 손으로는 가방을 챙기면서, 빨리 가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후로도 노바를 오가면서 봤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노바는 만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하고, 어설픈 영국식 억양을 섞은 말투로 뭔가 “깊은” 주제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취해서 횡설수설했으며, 때로는 전쟁과 정치와 난민과 가난과 종교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삶은 정말 경이롭지 않아? 그런 것이 삶이지 뭐. 이렇게 우리는 섞여사는 거야. 한 번은 만난 지 10초 만에 나에게 이렇게 물은 적도 있었다. 너는 무엇을 믿어?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다짜고짜 뭘 믿냐고?”라고 비웃으며 되묻고 싶었지만 얌전하게 “아무것도 안 믿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까칠한 나의 대답에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래? 흥미롭다. 정말 아무것도 안 믿어?라고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흥미롭다”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진심으로 들려서 괜한 신경질과 심술이 났다. 도대체 뭐가 흥미롭다는 건지. 사실 내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데“에는 기나긴 이야기와 시간이 있었고, 그게 정확히 노바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누구보다 흥미롭고 편견이 없이 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에게 얘기를 하는 것이 더 귀찮게 느껴졌다. 나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듯 딱 잘라 말했다. 응. 아무것도. 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실이기도 했다.
4일간 촬영한 셀린의 영화는 직장 동료들 간의 서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헤어살롱의 리셉셔니스트는 주니어 디자이너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고, 주니어 디자이너는 시니어 디자이너들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면서 리셉셔니스트를 하대하고, 시니어 디자이너들은 주니어 디자이너를 소외시키는 미묘한 인간관계의 서열에 대한 코미디였다. 평소 친한 사이였던 가브리엘라와 나는 셀린의 부탁으로 촬영을 도와주기로 했다. 가브리엘라는 조감독, 나는 스크립터로 와있었다. 하지만 촬영은 엉망이었다. 촬영팀과 미술팀의 셋업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려 스케줄이 4시간이나 지체되었고, 첫날에는 한 씬도 제대로 촬영을 하지 못했다. 첫날부터 밀린 촬영 스케줄은 모두에게 압박을 가했고, 자정부터 오후까지, 또는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지속되는 스케줄에 제대로 잠을 못 자는 스텝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가브리엘라는 눈치가 빠르고 일을 매우 잘하며 모두에게 친절한 성격이었다. 모두가 촬영계획표와 스케줄을 잘 따르게 하는 것이 조감독인 가브리엘라의 역할이었지만, 그녀도 촬영팀이나 미술팀의 더딘 속도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다가가 넌지시 눈치를 주고, 좋게 회유하며 은근히 압박을 주고 계속해서 촬영스케줄을 조정했지만 3일째가 되자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쌓이고, 찍지 못하는 씬들이 늘어갔다. 결국 밤에 셀린과 루시가 촬영계획표를 대폭 수정하며 샷리스트를 반 이상 잘라내야 하는 사태가 되었다. 가브리엘라는 촬영이 지체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해서인지 스트레스를 점점 더 숨기지 못하게 되었다. 프로덕션 어시스턴트에게 눈에 띄게 명령조로 지시를 내리거나, 그들이 떠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짜증을 부리고, 조명감독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평소의 가브리엘라답지 않았다. 연속되는 촬영으로 잠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인데 자신이 짜증을 내고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 체력과 마음이 곤두박이칠 치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가장 친한 사이인 나는 가브리엘라를 이해했다. 또 가브리엘라가 눈에 띄게 짜증을 내고 심술을 부리며 분위기를 흐릴 때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프로덕션 어시스턴트가 가브리엘라때문에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고 말하며 촬영 도중에 관두고 집으로 간 것이었다. 그 일로 가브리엘라의 스트레스가 최고치를 달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안 그래도 엉망인 촬영현장에 그런 일까지 생기니 셀린이 그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섞인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모두를 점심을 먹으러 내보낼 때, 나는 가브리엘라를 챙겨주며 기다렸다. 하지만 가브리엘라는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말투로, 지금 너무너무 화가 났다며, 빨리 너도 나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말했다.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가고 제시간에 와야 촬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나는 알겠다고 말하며 가브리엘라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라고 했어. 기다려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돌아오면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
하지만 가브리엘라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혼자 촬영장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가브리엘라가 평소와 다르게 아이처럼 군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혼자 있고 싶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자리를 떠났다. 갑작스러운 감정 표출에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피곤한 촬영 현장이 모두의 바닥을 드러낸다고 생각해 흥미롭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 하루였다. 노바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가브리엘라에게 문자가 왔다.
[아까 짜증을 내서 정말 미안해. 너무 스트레스받고 피곤한 상황이었지만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나는 그 문자를 받고, 대충 답을 보냈다.
[괜찮아. 나한텐 말해도 돼.]
그리고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다음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아니야. 내가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너를 그렇게 막 대하면 정말 안 되는 거였어.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
나는 오히려 그 문자를 받고 불쾌해졌다. 문자를 받기 전에는 가브리엘라가 단순히 내 앞에서 투정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자를 보고 나서야 그녀가 짜증을 부리고 신경질을 내고 막 대한 대상이 나였다는 사실을 오히려 인지하게 된 것이었다. 가브리엘라가 나한테 짜증을 냈구나. 그런데 가브리엘라가 셀린한테도 짜증을 내었었던가? 가브리엘라가 짜증을 낸 대상은, 모두 그녀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가브리엘라는 나를 만만한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만만한 사람이었나? 그리고 짜증이 난이유는 혹시 셀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이상 노바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줄곧 짜증이 우월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할 수 있어도 쉽게 짜증을 낼 수는 없다. 습관적으로 짜증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 짜증은 늘, 나를 받아줄 것이 분명한 상대를 향한다. 마음이 매우 넓거나, 내 밑에 있는 사람. 아니면, 마음이 넓고 뭐든 이해해 줄 것 같으면,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는 그 문자로 인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우리 셋의 서열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브리엘라와 나, 셀린 사이에도 서열이 있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혹시 가장 밑의 서열에 있었던 것일까?
(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