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익 찌익
추운 겨울날 초록 테이프를 당겨 잘라내다 보면 어찌나 접착력이 좋던지 테이프를 자르다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 끝 살점이 같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별다른 할 것도 없었다. 가방에서 커다란 포스터를 꺼내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전봇대든 계단이든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붙였다. 가득 차 무거웠던 가방이 제법 가벼워지고 테이프를 감싸고 있던 비닐만 나뒹굴 때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방금 전까지 붙였던 포스터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였다. 기껏 붙여놓은 포스터가 반쯤 찢어져 있거나 그 위에 다른 공연의 것이 붙어있을 때는 화가 날 법도 했지만, 너무 추워 화를 낼 에너지조차 없었다. 얼른 사무실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능글맞던 실장놈이 마시던 믹스커피의 뜨거운 향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옅어져 갈 때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마지막이다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아동 극단에서 공연 대본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포트폴리오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었고 지원 분야도 구체적으로 준비한 것도 아니었으니 너무나 당연했는데 모르고 있던 그때의 나는 참 멍청했구나 싶다. 꿈은 사치였을 뿐이었다. 소품 만들기나 공연장 청소 같은 일을 주로 했다. 매표소에 앉아 전화 응대도 하고 식사를 주문하고 보도자료를 들고 신문사를 돌아다녔다. 메일로 보내도 충분할 것 같은 보도자료를 만들어 신문사까지 발품 팔아 다녀야 하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굴도장 찍는 정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대부분 데스크나 보도자료 담는 통에 넣는 것이 전부였던 지라 그들이 직접 온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차라리 초대권이나 몇 장 박아 뿌리는 게 더 홍보효과에 좋았을 텐데. 하지만 전부터 그래왔기에 여전히 그러했던 것뿐이었다. 따뜻한 혹은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기사를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빛나 보였다. 백조를 바라보는 까마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을 때마다 ‘언젠가는’이라는 막연한 꿈을 포기하기 힘들었나 보다. 안타깝게도 변화가 크게 없는 곳이었다. 동화는 너무나도 다양했고 극단은 오래된 경력이 있어 기존에 했던 공연들이 많았다. 이미 한번 이상 했던 공연들은 그 공연을 봤던 아이들아 다시 찾아오기에 너무 자랐기에 몇 년에 한 번씩 소품과 의상을 예쁘게 손봐 다시 무대에 올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대표자가 과거의 대본을 조금 수정하기를 반복했기에 틈은 조금도 없었고 사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쳇바퀴 같은 굴레가 싫다고 했다. 깨트릴 수 없으니 벗어나겠다고 떠난 이였다. 벗어난 그를 떠올리며 우물 안에서 바깥세상은 위험하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개굴 대고 있던 즈음 공연기획사 아르바이트 같이 하자며 우물 밖에서 손을 내밀어 줬다. 지금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이끌려 나온 우물 밖의 세상은 낯설고 설레었다. 정성스러웠고 활기가 넘쳤다. 엄마 손을 놓고 첫 발을 뗀 아이의 마음이 그랬을까. 어쩌면 그 또한 다른 우물이었겠지만 작은 우물을 겨우 벗어난 나에게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문창과 출신이라는 이력서에 적힌 까만 잉크가 그들에게 쓸모 있었던 건지 극단에서 쌓아온 성실한 스킬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프로젝트 식으로 일했던 당시 다행히 일은 꾸준히 들어왔다. 꾸준함에 비해 사실 급여는 말도 못 할 정도였다. 2000년대를 살고 있음에도 대학로 연극배우 연봉이 300만 원이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여전히 공연계는 힘들었다. 나의 잔고도 힘들었다. 당시 스터디에서 만났던 이들이 첫 월급 80만 원이던 2000년대 초반 당시의 극단 월급을 듣고 “많이 준다”라고 놀라워했다. 배우 준비생, 작은 케이블 방송 PD, 안무가 혹은 학생. 아마 방송관련된 공부를 하겠다고 모였던 우리였던 것 같다. 나보다 이 쪽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나이도 경력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니 빠르게 설득당했다. 지금이었다면 당장 발을 뺐을 텐데, 어렸구나 아니 젊었구나.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갈망 같은 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지원한 것도 아니었던 대학 졸업장을 놓치지 않으려던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겠다.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는지 뻔뻔하기까지 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공연을 봤다. 다리 하나 건너면 아는 사람이 나오는 바닥인지라 알음알음으로 대학로 지하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배우 출신 연출자의 입봉작부터 대학교 강당을 빌려 공연하는 대형 공연까지 다양하게 한 숟가락씩 얹을 수 있었다. 대학로 곳곳을 누볐고 서울 여러 군데 공연장을 걸쳐 가끔은 지방 공연도 다녔다. 조명을 받고 박수를 받는 그들을 보며 전공 따위 사그라든 지 오래였고 그 빈자리에는 공연 기획자라는 새로운 꿈이 꿈틀꿈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 것에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조금 한심하기까지 하다. 간절하지 않았고 노력하지 않은 채 서서히 지워졌다. 문창과라는 이름의 가시가 목구멍에 박혀 걱정된답시고 한마디 던지던 주변의 말들보다 차라리 침묵이 나았다.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