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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을 대하는 용기

by 은빛영글

모처럼 만난 삼촌이 실컷 조카를 귀여워한다. 덕분에 형수는 소파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수 있었고 형은 꾸벅꾸벅 졸아도 눈총 세례를 받지 않았다. 삼촌은 작은 조카의 몸을 들어 올려 비행기도 태워주고 놀이터도 데려가 한참을 논 후 마트에 들러 아이의 작은 양손 가득 간식거리와 작은 장난감까지 안겨줬다. 뭘 이런 걸 사주냐고 미안해하는 형수에게 허허허 실없이 웃어 보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아쉬워하는 아이를 향해 아차 하며 지갑을 열어 용돈까지 쥐어 준다. 아직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이가 삼촌의 손을 향해 선뜻 손을 내밀자 형과 형수는 두 손을 내두르며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요, 안 주셔도 돼요,”

“어차피 아직 돈 몰라.”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삼촌이 우리 조카 귀여워서 주는 건데 좀 받아주라.”

어차피 줄 거라는 것도 알고 받을 것도 서로 알고 있다. 암묵적인 룰 마냥 엄마 아빠가 삼촌과 옥신각신 하는 동안 저 초록색 종이가 뭔지 다시 삼촌의 지갑으로 들어갈까 싶어 아이의 흔들리는 동공만 초조하고 허공에 뻗었던 손만 말없이 공기를 매만진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동창 모임에 힘껏 힘을 주고 나선다.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지난주에 미용실도 다녀왔고 새로 산 옷도 꺼내 입고 아끼는 가방을 골라 정성스레 화장을 한다.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반갑다! 너 살 빠졌구나?”

“왜 이렇게 예뻐졌어. 세월은 너만 피해 가나 봐.”

인사치레로 뱉은 말일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신경 써서 준비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공작새처럼 꼬리를 한껏 펼치며 잘난 척할 수도 있지만 우선은 입을 가리며 호호호 웃는다.

“에이, 아니야. 나 요즘 흰머리도 생겼고 살도 많이 쪘는걸.”

묻지도 않은 흰머리를 커밍아웃하고 분명 지난달 보다 빠졌는데 10년 전 리즈시절 무게를 떠올리며 쪘다고 나름의 겸손을 떨어본다.


“애가 피아노를 참 잘 치네.”라고 아이의 피아노 실력을 칭찬했더니 “공부는 도통 안 해서 걱정이에요.”라며 묻지도 않은 부족한 학업 능력을 고백한다. “ㅇㅇ이는 축구도 잘하고 성실한 것 같아.”라고 친구를 칭찬하면 “하지만 ㅇㅇ이는 축구할 때 몸싸움은 잘 못해.”라고 내 부모가 친구를 칭찬함을 질투하는 건지 부족한 면을 급하게 토해낸다. “중학교 들어가더니 키도 훤칠해지고 너무 멋있어졌다.”라고 폭풍성장한 이웃집 아이를 칭찬했더니 “교정을 시작해서 부끄럽다고 마스크만 쓰고 다닌다.”라고 궁금하지 않은 입 안 사정까지 줄줄줄 따라 나온다.



“고맙습니다.”

누군가 내게 해 준 칭찬, 호의, 긍정적인 인사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고맙다고 하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어째서인지 거절하고 부정하는 것이 겸손과 미덕이라 생각해 우선은 부정하고 깎아내린다. 나 자신도, 사랑하는 가족도, 소중한 친구까지 멱살을 잡고 함께 깎아 내려온다. 그 후에 곁들인 고맙다는 말은 이미 부정 뒤에 가려져 본래의 색이 사라져 버렸다. 부정은 긍정보다 힘이 강한 건지 이미 뱉어버린 부정적인 말에 뒤늦게 쫓아온 긍정의 인사는 전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선은 ‘아니에요’라는 말을 먼저 던진다.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일까 겁이 날 수도 있겠다. 무리 안에 조금이라도 잘난 사람을 칭찬하지만 자리만 비우면 험담 배틀이 이어지던 술자리 문화가 우스갯소리로 라디오에 소개된 걸 들은 적 있다. 나도 그런 적 있었다며 DJ와 출연자들이 크게 웃었다. 그래서 방광이 터질 것 같은데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덧붙임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시어머니 험담으로 며느리들이 대동단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도 같았다. 이런 이유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칭찬에 부정적인 답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들어보지 않아서, 해본 적 없어서 어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계속 그럴 필요는 없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보자. 충분히 칭찬받을 가치 있는 자신임을 기억하자.


태어난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노력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 칭찬을 했더니 고맙다고 하고, 호의를 베푸니 감사하다고 기뻐하며 웃어주면 상대방도 이런 사람에게는 계속 칭찬하고 호의를 베풀어줄 맛이 나지 않겠는가. 칭찬 심은 데 칭찬이 나오고 호의 심은 곳에 호의가 나올 것이다.


고.맙.습.니.다.


이 다섯 음절의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고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뜨거운 된장찌개에서 두부를 으깨어 밥에 슥슥 비비듯 겸손과 거절 따위 살살 으깨서 따뜻한 고맙다는 말에 비벼 녹여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


오늘도 제 글 읽어 주셔서 고. 맙. 습. 니. 다.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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