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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가 사라졌습니다

by 은빛영글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하였습니다. 치익-

잠들기 전 예약을 걸어 놓은 밥솥에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알람 삼아 눈을 뜬다. 화장실 불을 켜고 밤새 쌓아둔 것들을 배출하기 전에 쿠쿠의 뚜껑을 열면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에서 촉촉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따스함에 마음이 든든해져 윤기를 뽐내는 것들을 힘껏 저어내고 하품을 하면 아침이 시작됐다.




아이들 학원 라이딩을 하기 전에 쌀을 씻어두고 예약 버튼만 누르고 나가면 집에 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현관을 열자마자 들리는 증기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후다닥 반찬을 꺼내고 국을 데워 삐약대는 아이들 입에 들어갈 것들을 가지런히 셋팅했다. 부랴부랴 쌀을 씻고 쾌속으로 해야 할지 일반모드로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완성된 밥의 알림음은 친정 엄마가 와 계신 것처럼 든든하기만 하다.

헐벗은 몸뚱이에 수줍은 듯 다리를 포개어 누운 생닭과 각종 부재료를 넣고 만능찜 버튼을 누르면 국물까지 든든한 삼계탕이 완성됐다. 부드럽게 열리는 사이사이로 보이는 찹쌀까지 국물에 적시면 온 가족이 든든한 여름을 날 수 있었다. 정성 들여 지문이 닳도록 배와 도라지 껍질을 벅벅 문질러 얇게 벗겨내고 주름 사이사이 먼지까지 닦아 낸 대추에 칼집을 넣고 조청을 꾹꾹 짜내 밥 솥 가득 채워 넣는다. 수고스러움까지 한가득 눌러 담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달큰한 향이 가득한 배도라지가 완성된다. 도깨비 방망이를 이용해 이유식처럼 으깨 청으로 떠먹어도 괜찮고 채에 받쳐 숟가락으로 힘껏 눌러 즙만 짜내 작은 컵에 따라 한 잔씩 마셔도 괜찮았다. 버튼 하나로 만들어진 배도라지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랬던 쿠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튜브에서 뭘 본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주문한 묵직한 것이 택배로 배달 됐다.

예약 혹은 보온 버튼은 물론 만능찜 버튼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검색창을 열어 네 녀석의 사용법을 검색했다. 시간 맞춰 불 세기를 조절하고 뜸을 들여야 하는 정성스러움에 가마솥에 밥을 하던 여인네들이 떠올랐다. 내솥만 꺼내 슥슥 닦아내면 됐던 것이 시간을 들여 들러붙은 밥알을 불려내야 닦였고, 세제 같은 건 머금고 있다 다시 뱉어낸다고 하니 퐁퐁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손목이 꺾일 것 같은 무게감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편리한 세상에 번거로움이 추가 됐다.




“돌솥이 일반 가정집에서도 쓸 수 있는 거였어?”

손등에 찰랑찰랑 닿을 만큼 물이 있어야 한다는 건 주워들은 적 있었기에 호기롭게 손등을 세워 이만큼이 맞냐고 물어 함께 밥 당번이었던 동기들이 너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주방에서 쫓아냈던 스무 살의 농활 풍경이 떠올랐다. 전기밥솥에도 쌀 계량컵과 눈금이 없으면 밥을 할 수 없는 나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에 안겨진 건 쌈밥집에서나 보던 돌솥이었다. 밥을 푸고 뜨거운 물을 넣어 놓으면 눌려있던 누룽지가 구수한 숭늉을 만들어 내 터질 것 같은 포만감에도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그 돌솥이었다.

본인이 할 것도 아니면서 주 사용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구매한 것이 들려 있었다. 젠장, 튜브 좀 제발 끊어!


하지만 손등을 직각으로 꽂아 내리던 그때의 내가 아니다.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주부생활 십 년 차의 자존심을 걸고 사용 방법을 다시 한번 읽었다. 쌀을 넣고 물을 붓는 순간 반품은 불가능해진다. 비장한 마음으로 물을 넣고 긴장되는 가슴으로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돌렸다. 따다다닥 소리와 함께 화르르 솟아오르는 파랗고 빨간 불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머를 맞추고 울림에 따라 다음 단계로 진행했다. 센 불에서 10분, 약한 불에서 10분, 불을 끄고 십분. 별거 아니네. 조금 우쭐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고 쿠쿠의 그것과 비슷한 수증기를 느껴본다. 조금 더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밥그릇에 조금씩 덜어 넣다 보니 한 단계 레벨이 상승한 것 같은 만족감도 들고 괜히 윤기가 더 흐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아뿔싸, 불이 너무 셌다. 바닥에 단단하게 눌러붙은 노릇한 밥알이 보인다. 차라리 잘됐다. 떨어지는 것들은 누룽지를 좋아하는 둘째의 밥그릇에 올려놨다. 채 식지 않은 뜨거운 그것을 맨 손으로 집어 먹는 아이를 보니 프라이팬에 일부러 밥을 눌러 태워 누룽지를 만들어주던 번거로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지지 않는 것들은 쌈밥집에서 본 것처럼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았다. 사우나하는 아저씨들처럼 뜨끈뜨끈하게 은근히 몸을 불렸다.

보온 기능이 없으니 남는 밥은 반찬통에 따로 덜어 보관했다. 시간이 지나면 밥이 마르는 쿠쿠에 비해 돌솥밥은 밥이 굳지 않아 식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여전히 촉촉했다. 나쁘지 않은데?


까탈스러운 첫째도 돌솥밥은 한 숟가락 더 먹었고 뭐든 잘 먹는 둘째는 누룽지에 숭늉까지 클리어했다. 점차 익숙해져 갔고 가스레인지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던 10인용 쿠쿠의 까만 덩어리에는 소복소복 먼지만 쌓여갔다. 하얀 타일의 주방에 시커멓게 자리 잡고 있던 전기밥솥은 그렇게 비닐에 쌓여 창고에 박혔다. 편리함이 지고 말았다.


따다다닥

오늘도 요란한 가스레인지 불 소리와 함께 돌솥이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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