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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Feb 21. 2024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

허리를 깊게 구부려 신발 끈을 세게 당겼다. 하필 전 날 동대문에서 전시회를 보고 동묘 구제시장부터 종로 먹거리 골목까지 휘젓고 돌아다녔다. 정확한 걸음 수를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체감상 3만 보 정도 걸은 느낌에 퉁퉁 부은 발의 부기가 채 빠지지도 않았다. 조여 오는 신발 끈에 발바닥은 신발 속에 갇힌 채 이건 아니라고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하필 아빠도 없었다. 아이들이 많이 컸다고는 해도 안전에 대한 염려도 있고, 세명분의 물통과 간식을 메고 다녀야 함에 힘 좋은 아빠의 부재가 아쉬웠다. 여러모로 아빠 없는 등산은 처음인지라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저녁 늦게부터 비소식이 있어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내 발의 사정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가지 않아야 할 이유는 이렇게나 많았지만 어쩌겠나. 먼저 제안하고 약속을 잡은 그때의 나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고. 아이와의 약속 중요하다.


종종거리며 재촉하는 아이들의 신발 소리를 모른 척 구부리고 열심히 등산화의 끈을 고쳐 묶었다. 밥값 계산하러 가기 싫은 배 나온 아저씨처럼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리본을 예쁘게 만들어 묶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 둘째 아이에 비해 고작 주 1회 농구수업만 받고 있는 첫째 아이는 확실히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창 왕성해야 할 나이임에도 겨울방학 동안 한없이 나태해져 종이인형 같던 아이의 몸에 군살이 붙은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원 플러스 원처럼 함께 따라온 백수력의 상승과 체력감소는 애미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마침 방학 동안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있던 나의 뱃살에 적신호가 울리던 시기였기에 주말에 등산 약속을 미리 해놓은 터였다.

줄줄이 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검색창을 닫아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너무 힘들어하면 무리하지 말고 중간에 내려가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먼저 백기를 들고 내려가자 말해주길 기다렸던 것 같다.




등산로 초입은 왜 언덕 위에서 시작되는 걸까. 이 정도면 여기부터가 시작 아닌가 싶었다. 언덕 밑에 서서 위를 바라보니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배 나온 종이인형도 옆에 서서 이제 집에 가도 괜찮다고 종알거렸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싶어 되지도 않는 아재개그를 주고받으며 땅바닥에 달라붙은 발을 힘겹게 옮겼다. 그냥 걸어도 힘든데 양쪽에서 삐약거리는 목소리에 고막은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역시나 둘째는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 덕분인지 워낙 타고난 하체가 단단한 덕분인지 토끼처럼 깡충깡충 올라가는 뒤태에는 활기가 넘쳤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첫째를 약 올리고 도망가는 발걸에는 날개가 달린 것도 같았다. 젊어서 저렇게 빠른 거라며 헉헉 거리는 첫째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길이 좁아지고 단단하지 못해 질퍽거리는 땅이 많아졌다. 한 번씩 가팔라진 경사에 직립보행보다는 차라리 조금 숙여 걷기를 택했다. 손이 조금 지저분해지는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흙이 잔뜩 묻은 손이야 털어내면 그만이고 잔뜩 구부러진 허리는 천천히 일으켜 세우면 된다. 셀 수 없는 계단 앞에 놓였을 때는 까마득함에 휘청거리기까지 했지만 단숨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천천히 올라도 괜찮았고 중간에 한숨 돌리며 내려다 보이는 삐죽 솟은 건물들 사이에서 우리 집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날다람쥐처럼 번뜩대던 둘째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비인가! 어쩔 수 없이 집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나 내심 기대됐다. 하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다. 지쳐 녹아버린 줄 알았던 첫째가 조금씩 치고 올라갔다. 사실 첫째의 속도가 빨라진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둘째와 애미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 것에 반해 거북이처럼 꾸준히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설마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본인의 속도대로 묵묵히 오르는 뒷모습을 한참 떨어진 곳에서 올려봤다. 땀이 흐르자 벗은 겉옷을 이제는 엄마에게 던져주는 게 아니라 메고 있던 배낭에 차곡차곡 접어 넣었다. 아이 등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알록달록한 배낭에 괜히 마음이 울컥해졌다. 언제 이렇게 자랐니.

한참을 올라가 뒤돌아 본다. 엄마와 동생이 힘겹게 뒤따르는 모습을 보며 엉덩이를 털썩 바닥에 대고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여유도 보였다.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고 웃는 모습에 따라 웃게 된다. 평소에 옷깃만 스쳐도 기겁하는 둘이었지만 선뜻 손을 내밀어 끌어 주고 믿고 따른다. 길이 진흙이 되어 미끄러우니 제가 밟은 곳만 따라 밟고 올라오라며 가이드까지 해주는 모습은 유능한 선장 같았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쉬지 않는 까르르 웃음소리는 봄날의 병아리들 같았다. 새장 속 갇혀있던 새들이 새장을 탈출한 것처럼 쉬지 않고 재잘대는 기분 좋은 소란함에 뒤따르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잿빛 구름 가득한 하늘 사이로 태극기가 보였다. 지난가을, 동해 바다 같은 파란 하늘을 보여줬던 정상은 구름이 가득해 수묵화 같기도 했고 아득히 먼 곳에 보이는 롯데타워의 하늘 가까이 솟아있는 모습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나무로 가득했던 등산로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차가운 바람에 부스스한 머리가 흩날리며 정신이 들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건 나뿐이었구나. 등산 장비로 무장한 어른들에 비해 동네 마실 나온 꼴로 등산한 우리는 이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다들 대견하다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목소리에 아이들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헉헉대며 산을 오르는 데 한 시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내려오는 데 또 한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두 시간. 모처럼 스마트폰이나 잔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까마득했던 등산로를 빠져나오자 저녁부터 예보되어 있던 빗방울이 성질 급하게 튀어나와 벌써부터 한 방울씩 얼굴을 스침에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탔다. 한결 가벼워진 배낭을 털썩 내려놓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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