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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Jul 19. 2024

첫 경험의 나비효과

둥근 안경, 작은 눈, 여드름 난 이마를 덮은 앞머리와 귀밑 3cm 단발머리. 이런 내 모습이 싫었다. 중학교 때 이미 멈춘 성장이 뒤늦게 고등학교 동안 자라지 않을까 바랐던 엄마의 소망은 교복 치마를 두 번 접어야 맞을 정도로 넉넉했고, 당연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 크기는 줄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처음과 달리 닳아 번들거린다는 것뿐이다.

"참 공부 잘하게 생겼다."

하지만, 공부는 못했다.

"얌전하게 생겼네."

당시에는 A형이었고, 지금은 MBTI가 I니까 일단 내성적인 건 맞는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이 싫었다. 아마 실제 성격도 별반 차이는 없었겠지만, 조물주의 손끝에서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졌듯 사람들의 입 밖으로 뱉어지는 것으로 내 모습이 만들어졌다.



새끼 새는 알을 깨고 가장 먼저 본 것을 엄마라고 각인시켜 졸졸졸 쫓아다닌다. 실제로 그것이 엄마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당장 눈앞에 있는 낯선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라 여겼을 테니까. 사람들의 '말' 역시 내게 각인되었다. 자아가 만들어지며 하나의 사람이 되어가던 내게 나보다 한참 앞서있는 어른들이 뱉는 말들은 못마땅했지만, 그저 받아들였다. 뾰족뾰족했던 돌을 다듬어 나를 만들어갔다.




수능 백일주.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수능 백일 전에 술을 마시면 시험 날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실 술 따위 마실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장 더 봐야 했을 시기가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썩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부족한 수학 한 문제를 들여다보기보다 오늘이 100일인가 99일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택했다.

그날이 100일이었나 보다. 지글지글 빨간 기름을 사방으로 튀기는 닭갈비를 바라보며 작고 투명한 잔에 소주를 채워 넣었다. 그 집 부모님은 무슨 생각으로 꼬맹이들에게 술을 주셨을까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엉뚱한 곳에서 사고 치고 다니느니 그 편이 차라리 나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되었다. 알을 깨고 마주한 각자의 주량을.


사실, 소주 몇 잔으로 가늠하기에 당시 우리의 간은 몹시도 건강했지만, 쪼르르 받아 든 한두 잔을 비우며 금세 새빨개지는 친구의 얼굴과 비슷한 박자로 빨개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왜 굳이 집으로 부르신 건지 이해가 됐다. 이런 게 유전이구나. 그러다 고꾸라진 부녀에 비해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아빠가 한 병씩 마시던 빨간 라벨은 이런 맛이었구나. 쓰지만 달다. 비틀대는 친구를 침대에 던져놓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뚜벅뚜벅 잘도 걸어 집에 돌아왔다. 그래, 이런 게 유전이네. 그날이 처음이었다.

썩 나쁘지 않았던 처음에 비해 100일 후에 마셨던 것은 한없이 쓰기만 했다. 분명 같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걸 마셨는데 지독하게 쓰고 눈물이 났다. 곰은 동굴에서 백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지만, 백일 간 술을 마신 게 아니라 그런지 사람은 백일만에 개가 되었다. 마른땅 깊은 곳에서 샘물이 퐁퐁 솟아난 것처럼 '얌전하게 생긴' 굳게 닫혔던 입이 열리고, '공부 잘하게 생긴' 눈물샘이 폭발했다. 차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부어버렸다. 수능을 망쳤다, 망했다.



그 후로 술을 마실 일은 참 많았다. 고작 한두 살 차이가 엄청난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선배의 향음은 후배의 원샷'이라는 과 선배들의 구령에 맞춰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소주를 생명수라도 되는 양 들이부었다. 당시는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기에 '술을 잘 마시는구나'라는 말이 각인되어 화장실에서 먹은 걸 전부 토해내고 와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게 물인지 술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러고 싶었다.

술을 마시며 느슨해지는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평소에 자물쇠라도 달린 것 같은 입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말을 늘어놓았고, 덕분에 이불킥 할 일도 많았지만 가끔은 곪아 상처가 될 뻔한 이야기를 꺼낼 용기도 주었다. 나를 설레게 했던 오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 있는 용기도 주었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인류애도 샘솟았다. 그렇게 나의 삶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날을 함께하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청량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은 이걸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군지 노벨평화상 같은 거 줘야 하지 않나 감탄하며 하루의 긴장을 풀어버린다. 앞으로도 건강한 음주 생활을 위해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미 노곤해진 육체는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낯선 이와의 어색한 공기 따위 알코올에 적셔 촉촉한 공기로 만들어 줄 것이며 잔뜩 날이 선 예민한 기분도 조금은 둥글게 만들어 준다.


썩 괜찮았던 첫 경험이 각인시킨 지금의 나는 아마 오늘 저녁에도 냉장고부터 뒤지겠지. 뭐, 그러면 좀 어때. 처음도 아닌데.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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