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벌꿀 한 스푼의 행복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공의존의 시간에서 자기 돌봄으로 돌아오기
오늘 저녁 식사는 외주화 했다. 아침부터 “웨지감자튀김이 먹고 싶다.”라고 말한 남편이 퇴근 후에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온 남편의 손에는 의뢰인 님이 주셨다는 귤 한 박스와 꿀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꿀을 보는 순간, 문득 치즈 피자가 떠올랐다. 꿀에 찍어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피자는 전자레인지에, 감자는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외주화 덕분에 손쉽게 저녁상이 차려졌다.
꿀을 보는 순간, 어머님이 떠올랐다. 아침마다 꿀물을 드시던 모습이 생각나 ‘이걸 보내드리면 좋아하시겠지.’ 싶었다. 그런데 곧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 역시 꿀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엔 남편 먼저 먹이기로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살뜰하게 포장해 시어머니께 먼저 보내드렸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내게 좋은 것이 생기면 언제나 타인의 필요를 먼저 떠올렸다.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했던 말, 필요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내 손에 좋은 것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먼저 챙겼다. 그때 나는 그것이 ‘배려’이자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인정 욕구의 변형된 형태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안도감을 얻고 있었다. 집순이로 지내며 하루 대부분을 나 자신과 함께 보내게 된 뒤, 비로소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내 눈과 마음이 언제나 타인에게 향해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정말로 원했던 건 비슷한 물건이나 재정의 교환이 아니라, ‘넘칠 만큼의 애정과 인정’이었다는 걸. 그걸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이다.’라고 믿었던 우월감 뒤에는 사실 누구보다도 결핍된 내면의 아이가 숨어 있었다. 그 아이는 사랑받고 싶어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계속 ‘주는 사람’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듯 사랑하려 했다. 그래서 사랑은 늘 ‘누군가를 위한 증명서’처럼 흘러갔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공의존자(co-dependent)라고 말한다. 공의존자는 타인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돌봄이 반복될수록 자신을 잃어간다. 그들의 사랑은 타인을 향해 있지만, 실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나의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잃어가며 얻은 가짜 평안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최명기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의 순기능은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안다. 시험 실패와 병치레, 그리고 깊은 우울의 터널을 지나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누군가가 내게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때,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라며 웃던 내가 이젠 그 말을 삼키기 시작했고 참는 대신, 멈추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워야 했던 첫 번째 사랑의 기술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감정 경계 설정(emotional boundary)이라 부른다. 나의 에너지가 고갈되기 전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건 냉정함이 아니라 ‘건강한 자기 보호’이며, 지속 가능한 관계를 위한 새로운 방식이다.
예전엔 신앙 안에서도 헷갈렸다. ‘기독교인은 희생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늘 스스로를 뒷전으로 밀어두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즉,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랑의 전제가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배웠다. 오늘의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제 나는 타인의 행복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다. 벌꿀을 보며 시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스쳐도, 곧바로 벌꿀을 먹으며 행복하게 웃을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미소가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남편을 위해 달콤한 벌꿀 한 스푼을 입안 가득 넣었다. 꿀 상자를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마음조차 품지 못하게 하려고, 오늘 식탁 위에 올려둔 나 자신이 대견했다. 그건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자기 보호(self-preservation)니까. 그리고 ‘나는 충분히 돌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내면의 신념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극 속에도 반드시 플러스가 있다는 걸 이젠 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과거를 회색빛으로만 보지 않는다. 잃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움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소진시키고, 나를 버리는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히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인생지사 새옹지마. 살아 있다면 언젠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의 나와 남편의 행복을 위해 산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의 나는 그 에너지를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인간이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는 총량이 정해져 있고 내가 회복되어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니까. 오늘 밤, 벌꿀의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나와 내 가족을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의 달콤함을 기억하며 또 다른 하루를 버텨낼 나를 믿는다. 사랑도 나도 이렇게 한 스푼씩 익어가고 진해지겠지.
[사진 사용 서체 : 네이버 나눔 명조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