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굳었다

그리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by 차은설

갱년기 세계의 모든 사건은 아침에 일어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일.


그날도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아 집어 들려고 하는데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


갑자기 잠이 확 깼다.


왼손을 움직여 봤다. 아무 문제없다. 다시 오른손을 움직여 봤다.


오른손이 굳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른손의 손가락 관절들이 굳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관절들이 뻑뻑하게 맞물려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억지로 힘을 줘 오므려 봤다.


손가락의 다섯 관절에서 뼈들이 ‘기이이익’ 하고 마찰음을 내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지만 반밖에 오므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므린 손은 잘 펴지지 않았다.




첫 번째로 달려간 곳은 류마티스 내과였다.


증상을 들어보니 류마티스 관절염과 비슷하다면서 이런저런 검사를 권했다.


의아한 건 유전자 검사였는데, 이게 유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유전자를 뭘 어쩔 수 없을 텐데 왜 필요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유전자 검사는 매우 비쌌는데 같이 하면 좋다고 몇 번이나 권해서 일단 다 하기로 했다.


며칠 후 전혀 이상 없다는 결과를 들었다.


그 결과를 듣던 순간에도 내 오른손은 뻑뻑하게 굳어있었다.




그렇게 굳은 손은 무리를 해서라도 힘을 주어 잼잼을 하다 보면 점점 풀어졌는데, 운 좋으면 1시간 안에 풀어졌지만 운 나쁜 날은 점심때까지도 갔다.


그런 날은 굳은 손가락을 가지고 손목을 움직여 키보드를 쳐야 해서 손목에는 무리가 가고 몸에서는 식은땀까지 났다.


정형외과와 내과를 이리저리 더 다녀봤지만, 이렇다 할 만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딱히 문제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혹시 갱년기 증상 중에 이런 게 있냐고 물으면 다들 코웃음을 쳤다.


“아직 그럴 나이 아니니까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온찜질이나 하세요.”


사실 내가 난소가 없으며 요즘 ‘갱년기 증상.zip’을 겪고 있는 중이고 호르몬 치료 금기증이 있다고 하면, ‘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고.. 온찜질을.. 잘해주세요.”로 결국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온찜질을 종일 할 수도 없고, 손가락은 매일 아침 더 단단하게 굳었다.




병원 유랑은 계속되었고, 한 번은 진료 중에 다른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까지 했는데도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얘기를 했다.


“유전자 검사요? 그걸 왜 해요?”


진짜 궁금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의사가 권해서요. 하면 좋다고 하길래..”


말해놓고 나니 새삼 이상하긴 했다.


“그런 건 첨 듣는데. 그런 검사 필요 없는데..”


‘내 말이요. 나한테도 그래 보였는데 그 검사가 제일 비쌌으니 그 병원 재정에 필요했나 봅니다.’


의사를 100% 신뢰하지 말라는 교훈을 의사를 통해 얻게 된 순간이었다.


참, 믿을 사람 없네 진짜.




온찜질 말고 뭔가 더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지 궁리하면서 그동안 적어놓은 메모들을 들춰보다가, 한방병원에 입원했을 때 진땀을 물리쳐준 것들 중 하나였던 태반 주사가 생각났다.


같은 갱년기 증상이니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진땀의 시간 동안 쓴 약이나 수액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중에 뭐가 진땀을 물리쳐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태반 주사는 근처 내과에서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태반 주사는 멜스몬 계열과 라이넥이 있다. 그중 멜스몬 계열은 갱년기 증상 완화 효과가 인정되어 갱년기 증상에 사용할 경우 실비 청구도 된다.


인근 병원에 전화를 돌려 멜스몬 계열의 태반주사를 취급하는 내과를 찾았고 찾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손가락이 굳는 건 갱년기 증상 중 하나가 맞다고 시원하게 결론지었다.


다만, 태반주사는 갱년기 증상 완화에 도움은 되겠지만, 호르몬제처럼 처음부터 효과를 확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초반 몇 달간은 횟수를 자주, 그리고 어느 정도 효과가 느껴진다 싶으면 횟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줄이면서 유지하면 된다고 했다.


본인 가족도 갱년기 증상 때문에 십 년 넘게 맞고 있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사용된 지 오래된 약이라 부작용 걱정 없이 안전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동안 들었던 온찜질 조언보다 훨씬 맘에 들었고, 이 병원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나, 혹시 답정너인가.


처음부터 너무 기대하지 말고 두세 달 정도는 효과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생각하라고 했지만, 난 이미 마음속으로 내적 댄스를 추고 있었다.




태반 주사는 피하지방층에 맞는다.


보통 지방층이 많은 뱃살 - 배꼽 양 옆에 - 두 번으로 나누어서 맞는데 난 그때까지도 수술로 인해 배가 부풀어 있던 터라 배를 건드리기는 무서웠다.


내가 이러려고 팔에도 살을 찌웠나 싶게 팔에도 지방층이 충분했기 때문에 첫 주사는 오른팔에 맞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갸웃했지만, 이내 내 팔의 지방층을 보고 이 정도면 주사를 맞기 충분하다며 반색했다.


처음 맞는 거니까 효과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며칠 뒤에 꼭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이번에도 의료진들은 다 틀렸다.


주사실을 나와서, 계산을 하고 병원 밖으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렸다.


그리고 건물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오른팔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 찌릿하면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손가락 관절이 ‘기이이익’ 하는 느낌 없이 움직였다.


왠지 숨도 더 깊게 쉬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첫날이라 효과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와우.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갱년기 세계에서 길을 찾기 위해 의지할 나침반은 의사가 아닌 내 몸의 반응이었다.






[히치하이커의 메모] 나침반은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