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은 기세다

갱년기 세계의 진짜 고수를 만난 것 같다.

by 차은설

내 몸을 스스로 움직여 다른 장소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 경이로움은 아마 기어가는 법을 배우기 전에 처음 느꼈을 터다.


그리고 갱년기 세계는 그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나에게 되새겨 주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아, 둥근 해 미친 거 또 떴네..’라고 말해주는 알람음은 그날도 내 맘과 같았다.


그런데 침대에서 한 발짝 움직인 후 평소와 뭔가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다리뼈 두 개가 만나는 무릎관절에서 뼈들이 서로 붙어있다가 움직일때마다 서로를 갈았다.


뼈의 표면이 마찰로 갈리는 진동이 몸을 타고 머리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몇 걸음 더 걷자 발목도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할 발끝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그대로 발을 디디면 발목과 발의 어긋남이 찌릿하게 전달되었다.


그동안 발목과 발의 방향을 어떻게 같게 맞춰 걸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발목과 발의 방향을 정렬해보려고 했지만 왠지 내 컨트롤을 벗어난 영역 같았다.


뭔가 삐걱거리기만 할 뿐 잘 되지 않았다.




어릴 때 피아노 치는 사람이 멋져 보여서 유치원 대신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었다.


그때 그냥 유치원을 제대로 다녔다면 걸음마에 대한 기초 교육을 더 탄탄히 배울 수 있었을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일단 그날은 걷기가 힘들어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 새롭게 발생한 관절 이슈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생각했다.


이제,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생겼어요.’류의 퀘스트가 주어지더라도 어쨌든 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답으로 가는 길이 안갯속으로 들어가든, 낭떠러지와 만나든, 강으로 가로막히든 어쨌든 어딘가 도착할 거라는 것도 안다.


다만, 그게 계산기 누르듯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경험적으로 예상한다.




첫날은 사무실 내 자리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짧은 거리의 이동에도 시간이 꽤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벽을 짚고 발끝의 정렬을 맞추려 애쓰면서 무릎이 갈리는 진동을 느꼈다.


둘째 날, 셋째 날이 되면서 이러다가 무릎이 다 갈려버리면 그다음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출퇴근이 어렵다면, 재택이 가능한 업무를 찾아야 하나.


이번 퀘스트는 무릎이 다 갈리기 전에 재택이든 해답이든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넷째 날, 다섯째 날이 되자 걸을 때마다 느꼈던 뼈가 갈리는 진동에 이어 이제는 갈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 이거 알아.


손가락이 굳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손가락 관절에 효과가 있었던 약이라면 다른 관절에도 효과가 있겠지.


손가락만큼 반응이 빠르지 않았으나, 태반 주사는 무릎 관절에도 약간의 기름칠을 해주었다.


주사만으로는 약한 것 같아서 태반 약침이나 관절에 좋다는 한약도 추가했다.


그것들이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한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는데, 생각보다 일상생활에서 계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계단 몇 칸, 버스를 타고 내릴 때 계단 하나만큼의 높이 차이. 그리고 집이 복층이다.


집은 뭐 그렇다 쳐도, 무릎관절로 느려진 내 속도를 출퇴근길 사람들의 속도에 맞추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버스의 경우, 저상 버스조차 타고 내릴 때 도로와 버스와의 높이만큼 생기는 계단 하나를 안정적으로 오르고 내리려면 문옆의 뭔가를 손으로 짚어야 했다.


항상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녔지만, 버스를 탈 때만큼은 손을 제대로 짚기위해 두 손을 비우기로 했다.


교통카드조차 손에 쥐고 있다가 타고 내릴 때 손으로 짚기 불편할까 봐 스마트 워치에 넣었다.


그러고서도 타고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가능한 한 빨리 무릎 관절을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신호등 앞에서는, 초록불이 다 끝날때까지 도로를 건너야만 하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무릎관절이 허락하는 걸음의 속도로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반대편 길에 가 닿았다.


혹시 다른 사람들의 진로에 방해가 될까 봐 움직일때면 항상 앞뒤를 살폈다.


버스에서도 길에서도 회사 복도에서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뭔가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어느 출근길.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내리는 문 근처로 가서 섰다.


그 버스는 저상 버스가 아니라 계단을 몇 개 내려가야 내릴 수 있었고, 잠시 후 내릴 때 어디를 짚으면서 내릴지 눈으로 가늠하면서 한발 한 발씩 빠르게 무릎을 움직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 앞에는 오른손에 금속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가 첫 번째로 내리면 내가 두 번째 순서다.


곧 문이 열렸고 할머니는 지팡이를 든 오른손으로 문 옆의 봉을 짚으면서 계단을 내려서려고 팔을 뻗었다.


난 순간, 손에 뭔가를 쥔 채로 봉을 짚을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 건가? 어떻게 하는 거지? 싶어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지팡이를 쥔 할머니의 손은 짚을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허공을 몇 번 더듬다가,


‘챙그랑’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장군 같은 기세와 찰진 손목 스냅으로 지팡이를 보도로 던졌다.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잠시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지금부터 나름 최대한 빨리 내려볼테니 다들 잠깐 기다려 달라는 듯이.




난 무릎 관절이 아픈 사람의 움직임을 안다.


이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할머니는 내리는 계단옆의 봉을 잡았다.


계단 하나에 두 발이 다 옮겨지면 다음 계단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그러나 최대한 빠르고 신중하게 움직이려고 애쓰면서 모든 계단을 내려갔다.


그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로로 안전하게 착지한 할머니는 끙차 하고 보도로 올라가서 지팡이를 주워 들고 쿨하게 떠났다.


그 뒷모습에서 걸크러시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관절은 기세구나!




내가 무릎과 기타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고작 계단 몇 개와 신호등 앞에서 자신감을 잃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 짧은 순간, 불편한 관절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기세가 있는 자가 가는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역시, 어느 세상에서든 경력자는 위기의 순간 빛난다.


갱년기 세계의 (아마도) 고인물이었을 할머니가 보여준 그 길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히치하이커의 메모] 모든 건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