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취타

세탁실의 왕

by 차은설

난소가 없는 인간의 갱년기란 직접 체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갱년기'에 엑센트가 찍힌다.


그러나 타인들에게는 높은 확률로 ‘난소가 없는’에 엑센트가 찍힌다.




수술 후, 한방병원에서 보낸 3주 동안의 일상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집이 아니라 병원이어서 천만다행인 순간들이 많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남이 해주는 밥, 시간마다 적절한 케어, 갑자기 문제가 생겨도 언제든 손이 닿는 곳에 친절하다 못해 다정하기까지 한 의료진들이 있었다.




단, 세탁실 사용에 있어서는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좀 오래 기다리거나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병동 한편에 마련된 세탁실에는 환자 개인의 세탁물을 위한 세탁기가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 누군가 사용 중이라면, 그래서 나중에 다시 갔는데 또 누군가 다시 사용 중이라면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자원이 한정된 이상, 인생은 타이밍 세탁실도 타이밍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자연스럽게 그 구역의 질서가 생긴다.


병동의 세탁실도 마찬가지였다.




눅눅해진 수건 몇 장을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며 세탁실에 처음 입장했을 때 입구 쪽에서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병동의 보호자로 온 것 같은 그분은 이 세탁실을 이용하려면 먼저 내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듯이 나를 훑으며 말했다.


“새댁은 산후조리하러 왔는가?”


아무래도 이분이 세탁실 반장인 것 같았다.


“아니요, 복강경 수술했어요.”


나는 그분을 지나쳐 돌고 있는 세탁기로 다가가 표시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서 대답했다.


“무슨 수술?”


“난소를 둘 다 잘라냈어요.”


순간 등 뒤에서 호흡이 멈춘듯한 공기의 변화가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애기는 몇 살인데?”


“애기 없어요.”


그분은 상당히 난처한 표정을 하면서 다음 대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럼 남편이.. 걱정이..”


“저, 결혼 안 했어요.”


그분은 이제 더 이상 이어나갈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바라봤다.


마치, 조금 전 세상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선.


‘난소가 없다는 게 그런 표정까지 할 일은 아니고, 다만 지금 돌고 있는 세탁기가 곧 종료될 예정이라 다행입니다.’라는 의미로 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분의 표정은 더 심각해졌다.


내 미소의 의도가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전달된 것 같았다.


하, 나의 표현력이란.


그렇게 마주 선 나와 그분은 '이 다음 장면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문장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잠시 눈알만 굴리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세탁실 안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로만 가득 찼다.


문득, 앞으로 이 세탁실을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스쳤다.




며칠 뒤 복도를 걷다가 세탁 타이밍을 보러 세탁실에 들렀을 때, 여지없이 그 암묵적 반장님이 계셨다.


나를 알아보고 반색하면서 지금 돌고 있는 세탁기는 15분 정도 남았으니 15분 후에 오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몇 호예요? 끝나기 전에 내가 알려주러 갈게.”


“307호요”


정말 그분은 13분 후에 내 병실로 와서 이제 곧 이전 세탁이 끝날 거고 다음 순서를 나로 맡아줬으니 천천히 챙겨서 가라고 일러주고 가셨다.


와우, 난소가 없다는 건 세탁실 사용에 아주 편리하구나!




난 입원 내내 허리를 숙이거나 손댈 필요 없이 발만 넣어서 신을 수 있는 짭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복강경 수술 후 배에 힘을 주지 않고도 신고 벗기 편하다던 그 신발은, 대신 걸을 때마다 사악사악 소리가 났다.


세탁실에 입성할 때마다 짭크록스가 나의 등장을 소리로 먼저 알려주었고, 세탁실의 반장님은 언제나 나를 반기며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제일 빠른 사용 순서를 제시해 주셨다.


난소 두 개 없다고 그렇게까지 배려받을 일은 아니지만, 해주신다면 덥석 받는 것이 인지상정.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된 후, 이제 세탁실 반장님이 없어도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내 순서를 배려해 주었다.


‘아니 정말 이렇게까지 해주실 일은 아니지만, 잘 쓰겠습니다.’


난 퇴원할 때까지 덕분에 세탁실의 왕이 된 기분으로 세탁기 하나만큼의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사악사악', 짭크록스가 내는 소리는 세탁실에 등장할 나를 알리는 대취타 같았다.





[히치하이커의 메모] “I’m a king, I’m a boss. 다 알잖아 내 이름.”

-Agust D, 「대취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