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김남주 옮김
누군가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인공 폴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라고 답하고 싶다. 초반에 로제를 만나러 가는 폴의 거울 속 모습은 39살의 여자였다. 주름의 음영이 깊어지고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여자. 반면, 중후반쯤 시몽과 전화를 마친 폴의 거울 속 모습은 방금 누군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여자가 있었다.
안정감 있지만 조금 지루한 면이 있을지도 모를 40대 로제의 사랑, 열정 넘치지만 불안정한 20대 시몽의 사랑.
실내 장식가인 주인공 폴은 한번 이혼한 뒤, 로제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능력 있고 안정감 있는 그였지만 항상 우위를 독점하는 로제의 사랑에 폴은 외로워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제가 어린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서글픔에 빠져 일상을 살던 폴은 일터에서 20대의 매력적인 시몽을 만나게 된다. 시몽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열정적으로 다가간다. 폴은 처음엔 그를 거부하다 로제에 대한 외로움에 점점 시몽에게 마음이 기운다. 이러한 상황에 로제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둘의 사랑이 한낱 불타다 만다는 것을 알아챈다. 폴은 시몽과 사랑에 빠지는 듯했으나 결국 로제의 생각대로 폴은 안정감을 선택한다.
20대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결말을 보자마자 “에라이,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야!”라고 탄식했을 것 같다. 주인공 폴처럼 39살이었으면 폴의 선택에 공감하고 “그래. 우리 나이에 한 번쯤 눈 감아 줄 수도 있지.”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직은 30대 초중반이라 그런지 둘 중 누구를 응원할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바람만 안 피웠다면 로제였을지도, 날티가 있는 모습이 없었으면 시몽이었을지도. 40대의 사랑을 이해하기엔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이 남아있고, 20대의 사랑을 선택하기엔 모순적이게도 열정적인 사랑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더 흥미롭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만약 로제가 우위에 있으려고 하지 않고 대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폴 또한 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조금은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넷플리스 [이혼숙려]를 즐겨보고 그 외에 비슷한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는데 대화가 부족했었다. 거의 대부분 문제는 침묵이나 일방적인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보통 프로그램 진행 순서는 신청자의 사연이 먼저 나오고 그 후에 심리상담가와 심층 대화를 한다. 그때 대부분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눈물을 보이는 이야기는 사랑이었다. 애써 외면하며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자신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상담가와 대화를 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가가서야 자신의 입으로 사랑이 필요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게 ‘사랑해’ 혹은 ‘고마워’ 한마디로 관계에 대한 희망의 싹이 튼다.
2022년 방영되었던 [기상청 사람들] 드라마에서도 한 부부를 보며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느꼈다. 기상청 직업 특성상 변동이 많아 가족에게 소홀한 데다 무뚝뚝한 남편 엄동한 때문에 아내 이향래는 이혼까지 준비한다. 그렇게 상황은 극에 달하고, 드라마 마지막 화에 남편의 회사 숙소에서 둘은 다투게 된다. 그때까지도 남편은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는데”라고 한다. 그에 아내 이향래는 말한다.
[고마워]
[기다려줘서 고마워]
[참아줘서 고마워]
[좋아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둘은 그동안 못다 한 깊은 포옹과 다시 함께 살게 된다.
나 또한 20대의 첫 연애에서 상대에게 ‘고마워’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그때 당시엔 그 사실을 몰랐다. 군대도 기다린 만큼 항상 기다리는 위치였기에 그냥 철없이 사랑을 받고 싶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 불만이 가득했고, 미안하단 말만 나오는 상대의 입을 꼬집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관계의 끝맺음 또한 미안하단 말로 끝이 났다. 그 시기쯤, ‘럭키’라는 강아지도 보냈기에 옛 생각을 많이 하곤 했다. 럭키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함만 가득했다. 그러다 우연히 ‘좋은 추억을 주고 간 존재인데 행복해야지 왜 슬퍼하는가’라는 글을 봤다. 그 글을 보고선 럭키에게 [좋은 기억을 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 시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고마워]였다는 것을. 자신을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이 생각이 더욱 짙어진 건 지인의 부탁이었다. 8년을 만나다 헤어졌는데 ‘수고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은 끝내 듣지 못하고 속만 썩은 자신에게 고맙다 대신해주고 싶은 말. 나는 진심을 다해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이처럼 관계에서 사랑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서로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해질 즘 필요한 말은, [고마워]인듯하다.
가까운 관계에서 [고마워]는 사랑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상대의 수고를 알아주고 존중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사랑해’라는 말로는 자신의 거울 속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한 마디를 덧붙여보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