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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Dec 21. 2021

엄마의 응원

매미 노랫소리

     



출발 총소리가 들리면 총알처럼 빠르게 달려 나갔다.

곡선으로 꺾이는 구간에 들어서면 엄마가 나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며 팔을 흔들고 있다.

"은자야이, 살살 뛰라, 살살 뛰라~"

엄마의 응원을 듣고 나면 갈등이 된다. 이 속력으로 계속 달리고 싶은데 엄마의 응원을 무시할 수 없어 어중간하게 2등이나 3등으로 들어간다. 기분 나쁜 건 엄마나 나나 똑같다.


국민학교 때 늘 중이염을 달고 살았다.

원인은 과다한 수영이다. 지금은 마을 위에 저수지가 생겨 없어졌지만 그땐 길이 15m쯤 되는 웅덩이가 있어 어린 우리가 수영하기에 딱 좋았다. 운동신경이 좋아 뛰어노는덴 일가견이 있었다. 몸은 늘 집보다 밖을 향했다.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 휙 던져놓고 수영하다가 물고기 잡다가 또 소꿉놀이하느라 하루 해가 짧았다. 여름 방학은 그야말로 시즌이다.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개울로 향한다. 웅덩이가 크지 않다 보니 인원이 많아지면 왕복코스를 주행하기 힘들어진다. 복잡해지기 전에 가야 한다. 물속에서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던져주는 돌을 찾아오는 것도 가능했다. 물귀신이었다. 온종일, 온 여름을 그렇게 보냈으니 중이염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중이염이 심해진 건 5학년 때부터다.

처음엔 그저 매미 한 마리가 들어간 정도였다. 어차피 밖에도 매미소리 시끄러우니 귀안에 한 마리 넣어 다녀도 별문제 없었다. 그런데 가을이 오고 마을에 있던 매미가 다 떠나가는데도 매미는 떠날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엄마에게 매미 좀 꺼내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몰랐던 매미를 말하고 나니 모두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아 앞자리로 옮기고 더 심한 경우엔 서서 듣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진 걸 안 부모님이 진주 반도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학교 수업을 하고 있으면 오전 일을 마친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천방지축 깨금발을 뛰었다.


한 시간쯤 뒤 병원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지르는 아이가 있다.

악몽처럼 기억되는 주사바늘이다. 지금은 약물로 귓속 물을 말리기도 할 텐데 그 시절엔 다른 치료법이 없었던지 귀에다 주삿바늘을 넣어 물을 빼냈다. 엉덩이에 맞는 주사도 아픈데, 근육이라곤 없는 귀속에 주삿바늘을 넣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면봉도 깊이 찌르면 놀라는데 뾰족한 주삿바늘을 넣고 물을 빼냈으니 어린 것이 견디기 어려움은 자명한 일이다.

버스 타고 껌을 씹으며 올 때만 해도 좋았다. 의사 선생님이 껌 씹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귀한 껌을 눈치 없이 씹는 영광도 누리긴 했다. 병원에 도착해 대기하면서부터 벌벌 떤다. 발버둥 치는 나를 붙잡기 위해 아빠가 치료 의자에 먼저 앉아 나를 부둥켜안았다. 간호사 언니는 머리를 못 움직이게 잡는다. 의사 선생님은 무시무시한 주삿바늘을 내 귀에다 꽂는다. 발버둥 쳐봐야 귀만 더 아프다, 발버둥 칠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한 쪽 귀에 한 번으로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늘 두세 번 찔러 넣었고 눈물에 콧풍선 범벅이 되어야 진료는 끝이 났다.


고통스러운 치료에도 불구하고 차도는 없고 시일은 점점 지났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부산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시골에서 부산까지 다니기 여의치 않아 방학이면 사촌 언니 집에서 병원을 다녔다. 부산에서 받는 치료는 주삿바늘 치료가 아니어서 혼자서 다닐 정도로 수월했다. 한 달 내내 언니 집에 머물러 진료받고 나면 훨씬 좋아졌다. 다음 방학 때도 한 번 더 언니 집 신세를 졌다. 어떤 게 약이 되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꽤 오랜 시간 한약과 신약을 써 가며 치료를 했고 더 이상 병원 신세는 지지 않았다.


살살 뛰라는 엄마의 응원은 당연했다.

반박할 수 없는 것도 잘 알았다. 화이팅, 화이팅, v.i. c. t.o. r. y! 하는 응원이 엄마한텐 통하지 않았다. 무리하면 중이염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니 잠시의 기쁨보다 딸의 안녕이 더 중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데, 그걸 못하게 하니 1등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2등을 하기도 싫다. 살살 뛰어도 애들이 내 앞을 지나가지 않는다. 결국 골인 지점에서 어중간하게 2,3등을 하고 만다. 그래도 일등 하고 엄마한테 눈총 받는 것보단 그게 나았는지도 모른다.

작은 학교에 나보다 빨리 달리는 아이는 없었다.

귀가 안 좋아 치료를 받을 때 외에는 일등은 늘 내 차지였다. 그러나 내가 꼭 2등을 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엄마한테 업혀 달리기할 때였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1등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업힌다. 그러나 내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 엄마는 이미 꽃보다마흔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 갓 서른이 넘은 젊은 엄마가 있다. 달리기도 못하는 애들이 젊은 엄마 덕에 내 눈앞을 치고 나가면 경주마처럼 엄마 등을 두드리지만 늙은 엄마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농사만 짓다가 딸의 운동회에 경주마로 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은 가늠할 수 있지만 그땐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마흔이 넘어서니 다시 탈이 나기 시작한다.

무리하거나 피로하다 싶으면 귀가 먼저 신호를 보낸다. 높은 지대에 올라가면 귀가 멍~하고 막히는 그 상태로 아침을 시작한다. 막혀 있으니 말소리 역시 잘 들리지 않는다. 점심시간쯤이 되면 서서히 뚫린다. 귀와 코를 연결하는 혈관이 확장된 게 원인이라며 수축시키는 약을 먹으면 금방 좋아진다. 어릴 적이랑 원인은 다르지만 증상은 비슷하다. 아팠던 기억이 흉터처럼 남아 잠시만 방심하면 공격할 태세다.


귀보다 몸의 컨디션을 잘 유지해야 함을 알아간다.

영양제 먹으며 무리하지 않아야 함도 안다. 이제 내 나이도 몸 챙겨야 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어제 다시 목과 어깨 등이 피로해지자 귀가 다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막히는 게 아니라 귀와 머리통 전체가 피로하다고 신호를 보낸다. 과로하지 않아야 한다. 전조증상 같아 일찍이 누워 잠을 청했다. 어릴 적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반도병원 그 주삿바늘을 기억해야 한다. 힘내라는 다른 엄마들 틈에 '제발 살살 뛰라'고 부탁하던 엄마의 힘찬 응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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