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보다 마흔 Dec 18. 2021

심봉사 눈 뜬 날

효녀 심청, 심봉사 눈 띄우기



"아이고, 야야 심 봉사 눈 떴다 카드만, 참말로 눈 뜬 거 같다."


그러게, 그게 엄마의 거구가 문제였다.

젊은 날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면 뒷산이 엄마 때문에 다 가렸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엄마는 기골장대 했다. 덕분에 아들도 숨풍 숨풍 낳았고 힘든 농사일도 잘 견디어 내셨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살이 빠지니 그 살들, 늘어난 거죽이 문제였다. 빵빵했던 풍선이 바람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풍선은 작아지고 쭈글 해졌다. 지구의 중력이 젖줄을 하류로 흘려보냈다. 옷으로 가릴 수 있는 부분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연중무휴 내놓아야 하는 눈꺼풀이 내겐 숙제로 다가왔다. 그간 수없이 눈꺼풀을 걷어 내자고 설득했건만, 엄마는 아프지 않으니 괜찮으시다고 고집부렸다.


일흔이 넘도록 그 많은 농사일 다 했으니 몸은 만신창이가 다 되었다. 그러나 어지간히 아픈 건 병원에 갈 생각도 않는다. 엄마의 선택 기준은 아프냐 안 아프냐, 딱 이 두 가지다. 눈꺼풀은 처지긴 했지만 아픈 게 아니니까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나뿐만 아니라 이모들이 암만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아팠고 병원 들락거리는 것도 몸서리가 난다. 아픈 것도 아닌 걸 수술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할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엄마, 마침 할인 기간이야, 지금 놓치면 제 돈 다 주고 해야 해~"

통했다. 세일 작전에 엄마가 말려들었다. 명절을 보내고 오는 길에 엄마를 모시고 왔다. 아프지는 않지만 할인 기간이라 하니 못 이기는 척 길을 따라나섰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고혈압, 당뇨 같은 성인병 없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할머니, 여기 계단 밟고 올라가셔서 누우시면 됩니다."

"아이, 눈은 아프지도 않은데 뭐 한다고 자꾸 수술을 하라 카는지 모르겄어~ 나는 다리 수술을 해야 하는데,"

울 오매 개그는 수술방에서도 살아있다. 피부과에 와서 정형외과 의사를 찾으면 어쩌란 말인가.

막상 설득해서 모셔 온 엄마를 수술실에 넣고 나니 그제야 슬며시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걱정이 올라온다. 갑자기 대수술실에 들어갔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지간히도 병원 신세 많이 지신분들이다. 테이프 덕지덕지 붙여진 옆 할머니들을 보니 더 걱정이다. 혹시나 생길지 모를 뒤 탈에 대한 두려움이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나오신다. 웃으신다. 이리저리 살피는 엄마 눈이 웃는다.


"아이고 야야, 심 봉사 눈 떴다 카드만 세상에 내가 눈 뜬 것 같다. 훤~~~ 하다."

그래 그랬다, 엄마는 반쯤 덮인 눈꺼풀 때문에 반쪽으로만 세상을 봤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았기에 서서히 적응했고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커튼을 걷어 내고 나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이제야 남들이 보는 만큼 보인다.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훤한 세상을 본다. 그동안 보지 못한 세상이 갑자기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보이는 것 만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엄마는 훤~하다면서도 당신 눈에 험상궂게 붙은 테이프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창밖을 보고 거울을 또 보며 마냥 신기해하신다. 조금 있자 의사 선생님이 떼어낸 살덩이 두 덩어리를 가지고 뒤따라 나오신다.


" 할머니, 이거 한 번 보세요, 제가 개원해서 이렇게 많이 잘라낸 건 처음이에요~."

의사 선생님 얼굴에 왠지 횡재한 것 같은 성취감이 보인다. 예상치 못한 살덩이 두 덩이를 선물 받은 듯한 표정이다. '처음'이란 말이 죄송해야 할 '나'이지만, 엄마가 웃으니 나도 좋다. 의사 선생님께 영광까지 드렸으니 더할 나위 없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새롭다. 수술방 잠시 들어갔다 왔는데, 그간 몰랐던 환함을 얻어 간다. 세상이 좋은 건지 돈이 좋은 건지, 딸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며칠 더 머무르며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한사코 집으로 가시겠단다. 신기하고 좋아서 안 보이던 테이프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이 모습으로 퇴근할 사위를 볼 낯이 없다. 나도 더는 붙잡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 눈이 조금씩 퍼렇게 멍이 들어간다. 선글라스도 준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엄마를 보내서 영 마음이 불편하다.


"아빠, 엄마는 좀 어때?"

"네가 욕봤다. 그런데 멍이 자꾸 시퍼레지네."


"아빠, 엄마는 좀 어때?"

"수술은 잘 됐는지 모르겠는데, 멍이 시~퍼러니 영 호랭이 눈깔이 됐다. “

아빠 목소리에 두 분의 걱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어?아빠, 멍 들 거라고 했어, 약 잘 먹고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해, 고개 숙이고 일하면 안 돼!"

보지 못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뭔가 수술이 잘 못 된 걸까? 병원에 문의해 확인하고 다시 엄마를 안심시킨다. 일주일쯤 지나니 걱정이 가신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를 보러 간 오빠가 반창고 다 떼어 낸 엄마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

뽁뽁이로 꽁꽁 싸여 도착한 선물을 풀어보는 기분이다. 뭐가 들었을까? 어떤 모양일까? 선물을 다 풀어보곤 실망했다. 이쁜 선물을 기대했는데 원하지 않는 다른 선물이 들어있다. 중력에 순응하던 인자한 엄마 얼굴이 표독스러운 시어머니상으로 변했다. 축 처진 푸근한 엄마를 잃었다. 우리 엄마 같지가 않아 실망스럽다. 그런데도 엄마는 대만족이다.


"심 봉사 눈 떴다 카드만, 내가 네 덕에 눈떴다. 내가 참말로 우찌 너를 낳아서.... "

또, 또 레퍼토리 시작이다.

“너는 어찌 눈 수술해 줄 생각을 다 했노?”라며 오빠들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기특한 듯 말한다. 오빠들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엄마 눈꺼풀이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오빠들도 처진 눈에 너무 오래 적응되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시간이 또 한참 흘렀다.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심 봉사는 또 길을 나선다. 다시 중력의 부름을 받으시고 점점 낮은 곳으로 향하신다. 효녀 심청이 유효기간이 다 돼가는 듯하다. 어느 강물에 또 빠지기 전에 미리 처방을 해야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