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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Dec 28. 2021

양치기 소년

돌아온 엄마

아빠가 환갑에 쓴 자서전 - 정심선행


"형님,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심장이 떨어지고 다리가 내려앉았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왔다가 아빠가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장골이던 엄마가 여름부터 앓기 시작했다. 병원을 다녀도 낫질 않았다. 버스 의자에 혼자 앉지 못해 나를 다리 사이에 앉히고 내 등에다 몸을 기댔다. 경운기를 타고 밭에 따라가긴 했지만 일은 못하고 자루를 펴 놓고 밭가에 드러누웠다. 그저 흔한 감기몸살인 줄 알았다.


"형님, 한 번 다녀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날 밤, 아빠가 외삼촌에게 전화하는 소리를 방문 앞에서 들었다.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듯 무릎이 툭 꺾였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빠는 엄마 상태를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할 힘이 없어 아빠에게 가서 되묻지 못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다. 고1 기말고사 첫날이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를 갔고 시험은 어떻게 쳤는지 모른다. 성적은 훅 떨어졌고 선생님에게 불려 갔다. 우리 엄마가 이렇고 저렇다는 소리는 하기 싫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우리 식구 혈액형은 모두 B형이다.

엄마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해 여름 엄마는 간암 진단을 받았다. 주말에 엄마를 보러 가면 얼굴은 검게 변했고 눈은 노랗고 몸은 수축해있다. 오랜만에 보는 나를 반길 기운도 없었다. 마침 내가 간 그날 엄마에게 수혈이 필요했다. 병원에 여분이 없다며 환자 가족이 직접 구해오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


엄마만 O형이다.

B형은 누구에게나 받을 수 있지만, O형은 오직 O형에게서만 수혈받을 수 있다. 아빠도 오빠도 나도 있었으나 엄마에게 피를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흔하고 흔한 O형이 아무리 찾아도 구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암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우선 피를 구해야 했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진주,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번호가 기억나는 곳엔 염치 불문하고 모두 연락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으나 이미 길을 잃었다. 혼미해졌다. 그것은 분명 헛것이었다. 선생님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누구라도 만나면 부탁해야 할 때 마침 선생님이 보였다. 달려갔다. 분명히 선생님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려갔는데 거긴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아이러니한 꿈같은 일이다. 그때 왜? 없던 선생님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수십 곳을 전화한 곳 중 마침 친구 수연이 오빠가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수혈을 해줬다. 엄마는 위기를 넘겼다.


아빠의 자서전 - 정심 선행
그동안 환자는 환자대로 쇠약해지고 빈혈이 극심하여 두 봉의 수혈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O형 피가 병원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경남 일원에는 없으니 환자 측에서 피를 구하라는 것이다. 우리 식구에는 O형 피가 없고 귀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식 은자가 어린 나이에 친구나 친구 오빠들에게 전화로 아니면 직접 다니면서 사정을 호소했다. 미친 듯이 설치던 은자의 노력으로 임채수가 다니는 진주 전문대 김 OO(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유감)가 헌혈 정신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큰 고비는 넘겼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부인 큰 병나다 - 정심 선행 中>


수술 날 아침이다.

감암은 오진이었다. 암덩어리인 줄 알았던 건 농양으로 밝혀졌다. 뒤숭숭한 꿈자리로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작은 외삼촌이 간이 안 좋아 돌아가셨다. 은연중에 엄마도 가족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테다. 말없이 기도만 하시던 외숙모의 두려움도 컸을 테다.

개복 수술 대신 주사기로 피고름을 뽑아냈다. 의사는 두 홉이나 되는 피고름을 보여주시며 이제 안심하라고 했다. 그날 또 수혈할 피가 부족했다. 병원에 피가 없다는 걸 납득하기 힘들었다. 또다시 피를 구해야 한다는 게 감당이 안 돼 아빠는 엄마를 부산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병원 측의 불쾌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병원을 신뢰할 수 없었던 아빠는 엄마를 납치하듯 퇴원 수속을 밟았다. 살기 위해 부산으로 가는 중 오한 발열이 시작됐고 택시는 엄마랑 같이 사정없이 떨었다.


정심 선행 중


"부인의 병이 심각합니다."

"저희 책임은 없습니다."

"며칠이 고비입니다."

일일 드라마처럼 절망의 연속이었다. 오로지 아빠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대체 목숨에게 몇 번의 좌절을 하고 수술 동의서에는 몇 번이나 사인을 했는지, 수 없는 절망감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홀로 감당해야 했을 아빠의 야윈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가 거짓말처럼 돌아왔다.

패잔병이지만 어린 나에겐 금의환향이었다. 부러지고 다쳐도 엄마가 살아서 돌아왔다.

아빠가 외삼촌에게 전화하던 날, 엄마가 죽는 줄 알았다. 병문안을 다녀온 마을 사람들의 눈빛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픈 엄마와 병문안하는 아빠를 대신해 큰 오매들이 나를 챙겨주고 소여물을 챙겨줬다. 어린 제제를 보는 포르투가 아저씨처럼 큰 오매들의 눈빛도 나를 더 불쌍하게 했다.


양치기 소년처럼 엄마는 번번이 거짓말을 해 어린 나를 놀라게 했다.

'가망 없겠다, 요번에는 안 되긋더라, 우째야 되꼬? 쯧쯧쯧.....'

이번엔 못 돌아올 것 같다는 사람들의 속삭임 뒤에 있었을 엄마의 걱정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울 때 엄마도 울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못 오면 어쩌나' 하던 고1 딸의 걱정과 '이번에 못 돌아가면 어쩌나' 했을 엄마의 염려가 만나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왔다.


싹둑 끊어질 것 같았던 목숨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계속된 절망에 대한 보답인 듯 여든 넘어까지 자리 보존할 아량은 주셨다.

이번엔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번엔 진짜 안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제치고 거짓말처럼 엄마는 살아 돌아왔다. 거짓말쟁이일지라도 돌아와 내 곁에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덧)


아빠가 환갑에 쓴 당신 삶의 기록 <정심 선행>에

딸의 기억을 더했습니다.

환갑에서 여든다섯까지의 공백도 채워보기로 하셨으나 도무지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하시더니

며칠 전 전화에선 완성을 해 보시겠다며 힘을 내주셨습니다.

아빠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될 수 있도록 같이 기운을 모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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