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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06. 2022

우산 쓴 남자와 프리마돈나

조우



내가 우산 쓴 남자를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쯤이다.

내 친구 집 바로 옆에 친구의 외할머니 집이 있었다. 할머니는 일찍이 할아버지를 여의어 작은 집에 혼자 사셨다. 큰딸인 친구 엄마 곁에 살며 외손주들을 돌봐 주시고 같이 어울려 사셨다.

할머니 집에 가면 우산 쓴 남자가 있었다.

비료포대 속에 자부동(방석) 하나를 넣은 그곳이 바로 놀이터였다. 그 남자는 거기서 처음 만났다. 빨간 외투에 갓도 아니고 페도라도 아닌 까만 모자를 쓴 남자, 해도 없고 비도 안 오는데 파란 우산을 쓴 의미심장한 남자. 12월 비광, 그 속에 우산 쓴 남자가 있다.


눈썰미가 좋아 짝 맞추기엔 일가견이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고 나면 아침을 먹고 일찍이 친구 집으로 놀러 간다. 할머니 집에 가려면 친구를 데리고 가야 하니까. 백이 있었다면 할머니 집으로 바로 직행했을 테다. 그곳에서 친구랑 나는 화투 놀이를 했다.

고스톱은 몰랐지만 짝 맞추기는 잘해, 어릴 적부터 문화부 혹은 화류계로 나아갈 소질을 다분히 익혔다. 친구는 외할머니의 심오한 동양화 예찬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림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중학교 미술교사가 되었다. 나는 문화부도 아니고 미술 교사도 아닌 기억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미술 놀이는 동네가 떠나갈 듯 한 엄마 목소리가 들려야 끝이 났다. 지겨운 줄 모르고 비비적거리던 동양화는 어느 날 찾아온 우리의 사춘기와 함께 서서히 애정도 식어갔다.


참 별일이 다 있다.

새해 첫날, 프리마돈나(preMadonna) 닉네임을 사용하는 블로그 이웃이 비밀 댓글을 남겼다.

친정인 부산에 왔고 국제시장에 있는 엄마 가게에 날 위한 선물을 두고 가니 나오는 길에 꼭 찾아가라는 글을 남겼다. 온라인 세상이 오프라인화되어 가고 있다. 댓글로 공감하고 소통 하지만 본 적도 없는데 별난 사람들도 참 많다. 여름에도 휴가 왔다며 연락해 온 이웃을 만나기도 했다. 얼마 전엔 미국에 사는 이웃이 연하장을 보내기도 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이 생활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낯선 모습이다.

날 위한 선물이라니 외면하지 못하겠다. 오늘 오후에 나가 보겠다고 했더니 선뜻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하시는 가게는 민예 가게였다.

주로 외국인들 상대로 하는 한국 전통 상품들을 파는 곳이다. 수묵화 부채, 미니 한복, 복주머니, 열쇠고리, 엽서, 미니 칠기, 각종 공예품 수십, 수백 가지 물건들이 바닥에서부터 진열대, 천정까지 매달려 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회다. 고객들은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평생 업을 해 오신 어머님은 각국 언어로 고객을 상대하고 계산도 영어로, 베트남어로 척척하셨다. 저스트 모먼트, 하시며 서비스를 주시기도 하신다. 코로나로 손님이 줄어 고민이 많다고 하지만 앉아 있는 동안 제법 많은 손님이 오고 갔다.


그녀, 이웃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첫 댓글에 폭탄 그림을 마구 쏟아 놓으며 애정의 댓글을 마구마구 쓸 거라는 암시를 해왔다. 센 언니에겐 세게, 나도 협박 운운하며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첫인사를 나눴다. 그런 그녀가 나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온라인으로 댓글을 주고받다가 만나서 그런지, 원래 낯가리지 않는 탓인지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

올해 마흔이 되었다는 진정한 꽃보다 마흔, 이쁜 다섯 살 여자아이의 엄마였다.

이제 막 마흔에 들어 아직 삼십 대에 더 익숙한 그녀를 보니 내 마흔아홉과의 거리가 꽤 멀어 보인다. 새삼스레 젊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키우느라 그동안 잊고 있던 나를 블로그를 하면서 찾아가는 중이라고 한참 재미가 들려 들뜬 목소리다. 학창 시절 도서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꿈을 키웠다는 그녀, 주로 서평 쓰기를 하는데, 그동안 잊고 있던 꿈을 찾은 느낌이라며 생기가 전해진다.


꽃보다 마흔, 처음 블로그를 시작하던 나의 마흔도 생각났다.

그저 일기장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쓰느라 이웃도 없었고 상위 노출이란 개념도 없이 끄적거리기만 했다.

사춘기 아이들이 방황하며 자라듯, 마흔도 육아기를 넘어서며 적잖은 방황을 하는 나이인 것 같단 생각을 꽃다운 그녀, 마흔을 보며 했다.


"큰아버지 빨리 일어나 봐, 이거랑 이거 짝 맞아?

친구네 외할머니 집에서 그림을 맞추기 전, 조금 더 앞으로 되돌아가면 큰아버지한테 선행 학습을 한 기억이 있다.

넷째 큰아버지 집에 놀러 가면 다른 큰집에는 없는 화투가 있었다. 큰아버지는 화투 놀이할 짝지가 없어도 같은 그림끼리 세로줄을 세우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짝 맞는 그림을 가르쳐 주셨다. 큰집에서 자고 일어나 혼자서 그림을 맞춰 보다가 짝을 몰라 헷갈리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큰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빨리 일어나 봐 큰아버지, 이거랑 이거 맞아?

큰아버지는 아마 내가 큰 인물이 될 거라 생각하셨을 테다. 이렇게 학구열 높은 아이는 본 적이 없다는 듯 씽긋이 웃으며 가르쳐 주셨다.


친구네 외할머니 집은 월반이다.

선행 학습하고 갔으니 한 학년 올라간 곳이다. 친구는 할머니에게 배웠고 나는 큰아버지에게 배웠으니 설명 필요 없이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비료 포대에 딱 맞는 방석을 골라 그 속에 방석을 넣고 한 면은 뚫어 놔 다 놀고 나면 거기 화투패를 넣게 만들어 놀이와 정리가 한 방에 끝이 나도록 해 두었다. 어쩜 그런 기막힌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반들반들한 비료 포대 촉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동양화를 거기서 만났다.

진열장 한 곳을 자리 잡고 앉은 우산 쓴 남자, 12월 비광, 한국을 대표하는 동양화.

3광에 끼이면 2점밖에 쳐 주지 않아 대접을 못 받지만 오강의 힘은 막강하다. 고도리를 거느리는 광이라 똥광만은 못하지만 대접이 후하다.

새빨간 오버를 입은 우산 쓴 남자와의 조우, 마돈나를 만난 듯 반가웠다.

외국인들이 이 동양화의 쓰임을 과연 알고 사 가는지, 단지 동양 미술품으로 사 가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우산 쓴 남자와 프리마돈나,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블로그를 통해 이루어졌다.

귀찮음과 애정이 공존하는 이곳 블로그. 이 공간에 오늘 색다른 재미가 숨을 불어넣어 준다. 며칠 재미나게 갖고 놀 화투패를 선물 받은 날이다. 마돈나, 그녀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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