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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29. 2022

돼지국밥

쏘울푸드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뜨거운 청춘들은 한 겨울 시린 칼바람에도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나는 한 여름 뙤약볕,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운 날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깜빡하고 'hot'이란 주문을 잊어버리면 피 끓는 세프들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내놔 소름 돋게 만든다.

한 여름밤에 태어난 나는 그날의 열기를 흡입한 듯, 늘 뜨거움을 열망한다.

갈망과 대비되는 늘 차가운 몸은 자석처럼 뜨거운 남편을 끌어당겼고 그걸로도 부족해 뜨거운 음식을 끌어당긴다. 뜨거움은 내가 꿈꾸는 판타지이고 이상이고 영원한 노스텔지아다.


돼지국밥은 이 모든 것의 집합체다. 뜨거움이고 안식이고 향수다.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물은 물컵에 따라 마시듯, 돼지국밥은 뚝배기가 제 집이다. 얇은 스댕그릇이나 국수 그릇에 담아 그 뜨거움을 잃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따뜻한 음식 좋아하는 나는 뜨거운 것도 더 뜨겁길 원한다.

돼지국밥집이 망하는 건 '가스비' 때문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뼈를 제대로 고아 내는 데 가스가 많이 든다는 말이다. 게다가 뜨거움을 더 뜨겁게 하기 위해 뚝배기를 가스불에 올려서 달궈야 한다. 가스비 아끼고자 이 과정을 생략하고 트릭을 쓰기도 한다. 끓는 물에 담가놓은 뚝배기에 끓는 국물을 바로 담아내는 집이 있다. 국밥은 생명은 마지막 한 숟갈까지 남은 따뜻함에 있다. 달구지 않은 뚝배기는 한 그릇을 다 먹어도 더운 기운이 올라오질 않는다. 이런 집에 나는 다시 가질 않는다. 땀이 솟아 이마를 닦아내고, 마주 앉은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염치없는 콧물이 나와야 제대로 된 국밥을 영접했다 할 수 있다.


"어머, 혹시 시스타 효린?"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 눈앞에 가수 효린이 나타났다. 

조금 전 한 남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게 안을 한 번 살펴 본 남자는 "주차하고 올게요~" 하곤 사라졌다. 싱겁기는,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 잠시 뒤 가게 앞에 지붕 높은 연예인 차가 주차를 한다. 곧 그가 여성 2명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뚝배기 3개'

그가 조용필이든 효린이든 상관없이 내 눈엔 뚝배기 개수로 먼저 파악된다. 

가스불에 뚝배기 3개를 올리고 밑반찬을 준비한다. 슬쩍 고개를 들어 방금 들어온 손님을 보니, 어머나 그녀는 TV에서 보던 효린과 닮았다. 눈이 마주치자 먼저 씩 웃는다.

"어머, 혹시 시스타 효린?"

그녀는 이제야 알아보셨네, 하는 눈짓을 보내며 나보다 더 좋아한다. 나만큼이나 큰 입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녀가 내 가게에 오다니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사직운동장에 공연이 있어서 왔어요."

매니저로 보이는 그 남자는 스타가 들어가도 될 만한 식당인지, 다른 사람들은 없는지를 먼저 점검하러 왔었던가 보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난 시각이라 한산하다. 스타에 환호할 손님들 없으니 안심하고 오신 것 같다. 

그녀, 돼지국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단다.

노래는 그녀가 이 구역에서 제일 잘 하겠지만, 돼지국밥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스타에게 돼지국밥을 설명할 날이 오다니, 마치 문화재를 설명하는 안내자처럼 진중하다.


돼지국밥 세 그릇과 함께 내가 등장한다.

펄펄 끓인 돼지국밥은 너무 뜨거워진 나머지 이쁜 그녀를 탐낸다. 그녀의 옷에까지 튀어가 그녀와 몸 섞길 원한다. 엉큼한 속내를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어디 감히 아가씨를 넘보냐고, 차가운 숟가락을 찬물처럼 끼얹는다. 

펄펄 끓는 뜨거움 속에 부추, 부산 사투리가 좋겠다. 정구지를 넣어 숨을 죽인다. 뜨거움에 사르르 녹는 정구지는 애피타이저다. 그 위에 새우 열 마리와 그들이 몸담았던 바닷물도 함께 넣는다. 간이 큰 사람은 열 마리보다 더 넣고, 간이 싱거운 나는 열 마리로도 만족한다. 나는 맑은 돼지국밥을 좋아해서 생략하지만, 양념장 넣어 빨간 국물색을 내도 좋다. 하모니, 전체적인 하모니를 맛본다. 바이올린으로 시작된 잔잔함이 투란도트의 빈체로~에 딱 맞춰 저격하는 헌터걸처럼, 돼지국밥에도 딱 맞는 간의 세기가 있다. 잘 끓인 국물과 잘 삶아진 고기에 새우와 양념장으로 빈체로~에 이르는 하모니를 찾아야 한다.

공깃밥 반을 덜어 뚝배기에 만다. 한 공기를 다 넣는 건 국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남은 반 공기도 제 역할이 남아있다. 잘 말아진 밥에 돼지고기 한 점 올리고 녹은 정구지까지 올려 푸짐한 한 숟갈을 만든다. 익은 김치든 겉절이든 그 위에 한 점을 올려 클라이맥스를 찍는다. '후, 후~' 뜨거운 국밥에 뜨거운 입김은 거룩함이다. 뜨거움을 겸허히 받겠단 결심이다. 밥이 들어가기도 전에 침이 돋고 목젖은 꿀렁인다. 그대로 맞이한다. 살짝 감도는 느끼한 육즙은 돼지의 애욕인 듯 받아들인다. 양파와 마늘로 번들거리는 입안에 상큼함을 더해준다.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국밥 앞에선 레몬급의 상큼함이다. 국밥에 밥 알이 보이지 않을 때 남은 반 공기를 국물과 함께 먹는다. 깍두기가 남았지 않은가, 쓸모없는 인간 없고, 쓸데없는 반찬은 없다. 어찌하여 그 조합이 만들어졌는지 유례를 알 수는 없지만 그 밑반찬 구성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그녀에게 발성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처음으로 돼지국밥 교실을 찾은 그녀에게 족집게 강의를 한다.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된 발성법을 익혀야 한다. 제대로 돼지국밥을 만나지 못하면, 자칫 서민들의 전용물로 인식해 버리기 십상이다. 욕망의 돼지를 흡인한 그녀, 숨기지 않는다. 뜨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옷을 벗는다.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훔쳐보던 나는 살짝 실망이다. TV에서 보던 섹시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마른 몸이다.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처럼 그녀의 몸과 내 몸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것 같은 그녀가 돼지국밥 한 그릇을 뚝딱한다. 국밥도 국밥이지만 내 겉절이가 일품이라고 손톱보다 더 긴 손톱을 붙인 엄지를 내 보인다. 

저녁 공연을 앞둔 그녀가 마른 배를 채우고 돌아갔다. 그 공연은 보나 마나 최고일 테다. 내가 만 국밥과 내가 만든 생생한 겉절이를 먹고 갔으니 말이다.


뜨거운 곳에서 나온 나는 그곳이 어딘지 기억할 순 없지만, 태초의 온기를 기억한다.

부족한 열기를 늘 채우고자 뜨거운 사람을 찾고, 뜨거운 음식을 찾는다. 

내가 찾은 소울푸드는 바로 돼지국밥이다. 그 뜨거움을 거부하지 못해 3년간, 온전히 세상에 돼지국밥을 퍼날랐다. 이제 돼지국밥이 가져다준 소명은 다 했다. 뜨거움을 뜨겁게 맞이했더니, 이제 그만하고 내 할 일하라 한다. 아직 내게 남은 뜨거움과 앞으로 찾을 뜨거움은 어떤 것일지, 그걸 찾을 때까지 나는 식혀가며 글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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