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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an 25. 2022

분실신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중학생 때부터 쓰던 빨강 머리빗을 아직도 쓰고 있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 번 내게 온 물건은 고장 나거나 필요 없는 것 아니면 오래오래 사용한다. 싫증 잘 내는 성격도 아니라 지겨운 줄도 모르고 쓴다.

처음으로 내가 분실 센터에 전화를 한 것은 몇 년 전, 80번 버스 차고지였다.

그날, 버스에서 카톡 보낸다고 오른손 장갑을 뺐던 게 실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장갑 한 짝을 두고 내렸다는 걸 알았다.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종점 사무실에 전화를 해봤지만 결국 장갑은 찾을 수 없었다. 

손이 커서 마음에 드는 장갑 사기가 쉽지 않다. 가죽 장갑은 더욱이 더 그랬다. 장갑 끼고도 핸드폰 사용할 수 있게 검지 끝을 부드럽게 만든 제품이었다. 크기도 넉넉해 마음에 쏙 드는 장갑이었는데 내내 마음 쓰렸다. 마치 짝 없는 신발처럼 한쪽만 남은 장갑은 껴지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남은 한 짝을 버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라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늦은 아침을 먹으며 TV를 켰다.

'뭉쳐야 뜬다.' 김성주와 안정환, 김용만과 젊은 배우 한 명이 스위스 여행하는 장면을 담은 프로다. 아마도 코로나 이전에 방송됐었던 것 같다. 

사춘기 여학생들은 안 해도 될 백만 가지 걱정과 쓸데없는 상상 오만가지를 한다.

- 내가 결혼하고 싶은 남편의 성(性)은?

- 내가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는?

- 결혼하고 싶은 나이는?

- 내 이상형은?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들에 답을 하며 잠시나마 기쁨에 젖었다.

나는 한 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고 스위스를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 씨 대신 김 씨와 결혼했고 스위스도 아직 못 가봤다. 둘 중 한 가지는 이뤄야 할 텐데, 김 씨 그분이 스위스를 데리고 간다면 이상적일까?

영화 관람 좋아하는 남편 덕에 75인치 TV를 장만했다. 어쩌다 이렇게 시원한 장면을 보면, 거금을 투자한 보람이 있다. 만년설과 초록이 한 화면에 들어온다. 스위스라고 적은 꿈이 이뤄지면 좋겠다.

김성주가 여권 가방을 분실한 장면에서부터 봤다. 여행에서 제일주의해야 할 것 중의 하나다. 기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여권 가방을 분실한 걸 알고 여기저기 뒤적이며 찾는 장면이다. 행여나 몰래카메라가 아닌지 상대방을 의심하기도 한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다. 그럴 수밖에.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해 대사관에 연락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한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자 작당을 벌인 김용만 일당이 몰래카메라임을 밝히는 에피소드였다. 여행 중에 있을 수 있는 상황 설정을 해 재미를 유발했다.

멘토 선생님이 최근 동시집을 출간했다.

레드 브라운 가죽 장갑을 출간 축하 선물로 골랐다. 선생님과의 약속 장소로 갔다. 곧 도착하실 것 같아 입구에서 잠시 기다렸더니 꽁꽁 싸매고 나타나셨다. 

"아우, 선생님 추운데 왜 밖에 계세요~"

하며 손을 내미시는 데 까만 장갑을 끼고 오셨다. '망했다'와 '다행이다'가 네온사인처럼 지나간다.

다른 걸 할 걸 하는 생각과, 같은 색이 아니라서 다행 이단 생각이다.

"선생님 이거 장갑인데...." 

자리에 앉자마자 선물을 내밀었더니 바로 껴 보시곤 끼고 오신 장갑을 나에게 주신다.

"이거 늘어나서 샘한테 맞겠다. 이거 샘 껴요."

손이 커서 가죽 장갑을 사 본 적이 없다. 선생님 선물을 고를 때에도 껴보지 못하고 색깔만 보고 선택했다. 선생님은 내가 산 것보다 더 좋은 장갑을 내게 주신다. 적당히 늘어나서 내 손도 쑥 들어간다. 횡재다. 내 감사는 제2 금융권이라 늘 복리로 돌아온다.

"헛 그 참 또 반지가 없네."

아빠는 방에 들어와 누워서는 반지가 없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너무도 태연하시다. 마치 반지를 어디에서 잃어버리셨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다.

살이 빠지자 손가락에 낀 반지도 헐거워 최근 몇 번을 잃어버렸다가 찾으셨다. 이번 반지도 잃어버리고 새로 한 건데 또 잃어버리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서 아빠?"

"부슥(부엌) 앞에 있으끼다. 거 있다 왔응께."

애써 찾으실 생각도 않으신다. 오히려 애가 닳는 건 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아빠는 반지를 찾아오셨다. 나뭇가지 좀 만졌다고 반지가 빠질 지경이니 어딘가에서 곧 또 잃어버릴 게 뻔하다.

"아빠, 그거 또 잃어버리는 게 낫겠나, 그냥 나 주는 게 낫겠나?"

"하고 즙으면 너 해라."

아빠 약지에 끼는 반지가 내 검지에 딱 맞다. 

집에 돌아와 아빠 생각이 나면 그 반지를 꼈다. 아빠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순금 5돈을 끼고 다니기엔 내 나이가 조금 어린 듯해 지난해 금값 껑충 올랐을 때 이쁜 목걸이로 바꿨다. 아빠의 반지는 목걸이가 돼 매일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딸은 얄미운 도둑이라고 한다.

아빠는 분실신고도 못 해보고 날강도 같은 딸에게 반지를 빼앗겼다. 물욕도 없으신 데다 딸이 탐을 내니 두 말 않고 주셨다. 어릴 적 아빠 등에 달라붙어 다니던 딸은 이제 분신처럼 아빠를 목에 걸고 다닌다.

잃어버린 반지는 찾으면 되고 여권이랑 장갑은 분실 신고하면 되고, 그도 안 되면 새로 사면 되는데, 아빠는 잃어버리면 어디다 전화를 해야 하지? 하느님에게 전화하면 받으시려나?

두고 내린 장갑도 당혹스러웠는데, 그날의 혼란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기도보다 더 셀 것 같은 주문을 걸어본다


나는 좀체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나는 좀처럼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 물건은 좀체 잃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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