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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Feb 08. 2022

할아버지 기억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전, 할아버지 욕하시던 것만 기억나는데요."


인간이 이생에 살다 간 흔적이 이렇게만 남아있다면 다시 깨어나 통탄해야 할 일이다. 어찌 한 생명의 몸값이 이렇게 밖에 안 된단 말인가?

위인으로 남았거나 용기를 줬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사랑이라도 남겼어야 했는데, 손주에게조차 할아버지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비참할 지경이다.


시아버님은 수목장을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숲이어서 명절 차례를 지내기 전에 다녀온다. 가봐야 봉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봐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다녀온다. 소주 한 잔과 마른안주를 놓으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드린다.

"할아버지 우리 왔어요~"

딸은, 반갑게 할아버지를 부른다.

"요렇게 이쁜 건, 우리나라에는 없을 거다. 미국에나 가면 하나 있을랑가 몰라도."

아버님은 손녀를 이뻐하셨다. 머리카락도 많지 않아 늘 남자아이로 오해받던 아이였는데도 할아버지 눈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손주였다. 조그마한 입술에 쌍꺼풀, 반곱슬이라 살짝 말리는 머리끝, 통통한 몸매, 손자와는 다른 애교... 아버님은 아들도 좋아하셨지만, 품에 와서 안기는 딸을 이뻐하셨다.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하니 둘 다 놀랜다. 아이들 기억에 남은 할아버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전, 할아버지가 욕하던 기억밖에 안 나요."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이 남긴 흔적이다. 고귀한 인간으로 와서 살다가 갈 때도 세상에 온 모습처럼 귀하게 가야 한다. '잘 산다'라는 정의만큼 어렵고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없겠지만, 아들의 말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아버님은 젊어서부터 자기 멋대로 사신 분이라고 들었다. 시집와서 10여 년, 내가 봐 온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정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얽매이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사셨다. 늙어서 커다란 안방을 차지하고 계셨지만 뒷방 늙은이 맞도 못한 대접을 받으셨다.


어머님의 고생은 안 봐도 훤하다. 부인을 무시하고 자녀들을 양육하지 않으셨다. 수입은 들쑥날쑥했고, 형제들과의 불화의 씨앗을 스스로 만들고 감당은 온전히 어머님의 몫으로 치부하셨다.

시댁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나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경했다. 존경하고 모셔야 할 어른이지만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에 적잖은 실망이었다. 특히나 내가 제일 곤란했던 건 매 끼니 밥상이었다. 밥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내게 아버님은 요리사의 솜씨를 원하셨다. 어머님과 며느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고 감정을 표출하셨다. 친정에서 보지 못한 그림이라 당황스러웠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님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아두신 하소연을 나에게 다 털어놓으셨다. 그 세월이 하도 길어서 듣는 나도 힘들었다.

"죽일 수도 없고, 이혼할 수도 없어서, 늙으면 보자 하고 살았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늙으면 복수해 주려고 살았다고 하신다. 하지만 복수도 하기 전에 아버님은 병이 나셨고 그 길로 돌아가셨다.

건강하실 때도 마음대로 하시던 분이 병환에 들자 더 안하무인이 되었다.


"엄마,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한테 욕했어".

퇴근하고 돌아오면 어린 아들이 나에게 안겨 울었다. 나 없는 동안 아들이 당했을 곤란과 상처가 아려온다. 어려서 가르쳐야 할 사람도 아니고 건강한 사람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아이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하소연해 봐야 남편도 제 아버지에게 달리할 말이 없었다.

남편을 비롯한 시누이들은 모두 화가 억눌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무서운 존재였다. 대쪽 같은 강직함에서 오는 무서움이 아니라 술과 폭력에 기인한 저급한 무서움이었다.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야".

시누이도 시집을 가서야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다투는 부모님과 그 속에서 살아온 날들이 마치 캄캄한 터널 같았단 말이다. 상상할 수 없다, 그 슬픔과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마음껏 소리 내어 웃지 못하는 남편의 억눌린 감정을.


어제 아들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아침밥을 먹으며 다시 질문해 본다.

"다른 기억 없어요".

아들은 단호하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내 질문조차 싫은 건지도 모른다.

슬프다. 다시 일어나 제대로 살아보라고 어깨를 흔들어 깨워주고 싶다. 왜 인간의 삶이 이렇게 비참해야 하는가?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 느낀 아픔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말 하고 잘 살았다. 그것이 이렇게 비참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다. 죽은 자가 어찌 알겠는가.

아직도 아픈 내 아들의 상처는 어떻게 다독여줘야 하는가? 무심코 던진 돌에 어린 아들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을 바꿔버렸다. 기억과 말투에 전해지는 상처에 내가 아프다.


성찰해야 한다.

내 걸음이 바른 지 뒤돌아봐야 한다. 죽기 전에 돌아보지 말고 하루하루 돌아봐야 한다.

좋은 기억으로 그리워할 사람은 못 되더라도 떠올리는 일조차 고통스러운 생을 살아선 안된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반성해야 한다.

오늘 내 말이 죽어서도 100년을 갈지도 모른다. 어느 이의 가슴에 맺혀 죽어서도 죽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후회를 후회하지 않도록, 너무 늦게 반성하지 않도록, 잘못한 일에 일찍이 사과할 수 있도록, 사과할 일 만들지 않도록 공부해야 한다.

사는 동안은 나의 생이지만, 죽고 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내 목숨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고는 못 되더라도 최악은 되지 않도록 한걸음 한 걸음을 돌아보자.


설날, 죽은 자 앞에서 들은 아들의 말이 살아있는 나에게 깨우침이다. 뒷머리가 찌릿찌릿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한 깊은 성찰, 한 살 더 먹은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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