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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Mar 08. 2022

눈맞았다.

바람난 봄동산




눈맞았다



벚꽃이 휘리릭 떨어져


개나리 눈 맞았다

철쭉꽃도 눈 맞았다

민들레도 눈 맞았다


큰일 났다

봄꽃들 모두 눈맞았다



- 꽃보다 마흔 -







그곳에 꽃나무가 있었던가?


모두 떠나버린 여름 해수욕장처럼 모든 욕심 떨궈낸 꽃나무는 눈길을 받지 못했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심한 내 눈길만 있었을 뿐이다. 꽃나무는 오랜 여행 떠나는 방랑자처럼 최소한의 차림으로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행여나 눈 마주쳐 껴입고 껴입은 내 옷을 하나 내어주기라도 해야 할까 봐 그 눈길을 외면해 왔다. 무심한 눈길에도 봄나무는 원망 대신 용서를 택해 꽃을 피워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기온이 올라간다. 완연하진 않지만 성질 급한 꽃들은 추위도 아랑곳없이 터져 나온다. 한두 번 더 찾아올 꽃샘추위를 어떻게 맞을지 새삼스레 걱정이다. 한겨울 칼바람에도 살아남은 용맹을 상기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내 한계다.


지난해 봄, 진득하니 제자리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봄꽃을 찾아 떠났다. 하동 악양, 지인의 시골집에 따라나섰다.

토지의 고장, 평사리 입구에 들어서자 아직 덜 피운 벚꽃이 꽃터널을 만들어 환영해 준다. 그것만 해도 충분한데도 만개하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오늘이 꼭 그날이어야 된다는 듯, 겨우내 없던 꽃이 나왔는데도 모자람을 탓한다.

구불구불 산길을 사륜구동도 아닌데 잘도 올라간다. 집을 찾아가는 건 기능보다 본능이 우선한 일인가 보다. 초행자라면 엄두도 못 낼 산길을 제집이라서 중형차를 사륜구동처럼 거칠게 밀어붙인다.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던 산속에 어느새 마을이 나타나고 지인의 집터는 그곳에서 더 올라간다. 구불구불 산길에서 미처 예상치 못한 너른 평지가 산꼭대기에 펼쳐진다. 서희가 내려다보았을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중턱은 같은 하동이라도 봄이 늦다. 입구에서 맞이해주던 그 꽃은 오히려 만개였다. 깊은 산속에 있는 꽃은 아직 터지지 않은 팝콘이다. 열을 가하면 파바박 터져버리는 팝콘처럼 피날레를 품고 있다. 아랫마을의 남아도는 열기가 이곳까지 전해지면 옥수수 알갱이에 불과하던 이 꽃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를 테다. 미처 터지지 못한 한두 알도 덩달아 팝콘향을 낼 테다. 아찔한 절정이 될 테다.


인간에게 청춘이 있었노라고 봄꽃과 같을까?

내 짧은 청춘은 봄꽃보다 찬란했을까? 단 한 사람에게라도 봄꽃 같은 환희를 주었을까? 내 청춘과 내 만개를 나는 과연 알았을까? 거울 속의 꽃을 내가 알아보았던가? 지금과 사뭇 달랐던 그 얼굴과 그 몸과 덜 여문 사고마저 만개한 청춘이었음을 멀찍이 오고서야 알게 된다. 저 꽃들은 지금이 저들의 한가운데임을 알고 있을까?

내가 결혼하던 스물네 살, 내게서 보지 못한 청춘을 어느새 그 나이가 된 딸아이에게서 느낀다. 아직도 여드름 툭툭 터져 비명을 토로하지만 그것마저 꽃 터짐 같은 청춘이다. 그 자체만 해도 봄인데 팔라리한 치마를 입고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어 봄에 봄을 더한다. 가만있어도 충분한데 치장을 더해 청춘을 재촉한다.


절정에 이른 꽃에 샘을 내는 바람이 인다. 꽃을 가져다준 바람이기도 하지만 꽃을 거둬가는 바람이기도 하다. 희로애락이 그 속에 들었다. 파르르 몸을 떨며 버티고 버텨보지만 터진 몸에 불어닥친 추위는 겨울 칼바람보다 더 모질다. 이기지 못한 꽃들은 나무 아래 개나리에게도 나리고, 철쭉꽃에도 나리고 민들레에게도 나린다. 하동 지인 댁의 어린 머위잎에도 내리고 취나물 위에도 내리고 매화나무와 돋아나는 쑥 위에도 내린다. 가는 길 미련 없이 새하얀 눈이 되어 내린다. 하지만 은혜 같은 눈 내림엔 심술이 가득하다.

그 출생이 화려하고 지체 높은 목련이나 동백은 아니지만 벚꽃도 은연한 꽃이라 그 천성에 유혹과 매혹을 담고 있다. 살아서는 은은한 향내와 단아한 자태로 은근슬쩍 유혹하지만 마지막 숨을 다하는 순간엔 제 본성을 숨길 이유가 없다. 마지막 남은 숨을 낮은 곳으로 보내 무분별하게 눈을 맞춘다. 하얀 눈의 모습으로 살며시 내려앉아 온 봄 동산에 구설수를 뿌린다. 눈맞은 뭇 봄나무들이 저만 은을 입은 듯 기고만장하다. 조용히 나린 눈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간다. 님 두고 먼저 떠나는 여인의 맹렬한 질투다.


봄은 무방비해서 대책이 없고 충동적이다.

조울증 환자처럼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잘 짜인 설계도처럼 계획적이지 못하다. 모니터를 붙들고 긴 겨울도 잘 살았으면서 불어오는 콧바람을 이기지 못해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그것마저 제대로 끼어 신지 못하고 뒤꿈치를 접은 채 조급하다. 내디디는 발걸음이 단정하지 못하고 헛발질을 해댄다. 발갛게 터져 나오는 봉오리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 아래 가만히 앉았노라니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터져 나온다. 봄이 이토록 뻔뻔하고 노골적인 모습이었던가? 그 향과 행위에 취한다.

신윤복의 월하정인의 연인들처럼 가쁜 호흡이다. 달빛 아래 치맛자락 뒤집어쓴 미인을 대하듯 가슴이 벌렁거린다. 얼굴만 빼꼼히 내 민 기생처럼 예고 없이 나타난 봄꽃에 대책 없이 넋을 빼앗긴다. 봄은 죄가 없다. 봄바람은 꽃바람이라 허파가 부푸니 충동을 억제하는 건 오히려 상사병을 키우는 일이다. 점잔과 체면은 책상 위에 두고 나와야 한다.


꽃 한 송이, 사람 하나가 내 마음에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잠시 삶의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정점을 찍는 봄꽃은 소프라노와 같아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다. 절규에 가까운 그들의 아리아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잠시 멈추고 삶을 돌아봐야 한다. 온 사방에 눈을 내리고 온 동산에 추파를 던지는 유혹에도 몸이 닳지 않는다면 빨간불 켜 놓고 점검을 해야 한다.

그곳에 유혹하는 봄이 내려앉아 눈맞추길 기다리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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