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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May 10. 2022

시력검사

중년의 시력저하



우리 신체 중에서 나이 들면서 더 좋아지는 건 뭐가 있을까?

탄력이 떨어지고 얼굴살이 빠진다. 근육량이 줄어 허벅지도 줄어든다. 무릎도 한 번씩 소리가 난다. 허리살은 늘어가고 뱃살은 솟는다. 머리숱은 줄어들고 귀도 종종 탈이 난다. 눈은 자주 빨개지며 가끔 실핏줄도 터진다. 병이 생기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고 아파도 괜찮은 곳도 한 곳도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하나둘씩 아픈 곳이 생긴다. 내 또래들도 간혹 암이 발견됐다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의 사망 소식도 들려온다. 나도 귀와 발바닥 등 불편한 곳이 드러나지만, 다행히 아직 중증 없으니 이만하면 건강한 편이라 생각한다.

여성들에겐 생의 큰 변화를 겪는 나이가 오는데, 바로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여성성을 잃고 예상치 못한 증상에 심신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친구들도 하나둘 폐경을 맞이하고 있다. 전혀 증상이 없다는 친구가 있는 반면, 감정의 기복은 물론이고 더위도 아닌데 갑작스레 오르락내리락하는 열감 때문에 괴롭다는 친구도 있다. 친구들과 언니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또 하나의 갱년기 증상은 콜레스테롤 수치 상승이다. 멀쩡하던 HDL, LDL 이 100을 넘어가며 약을 처방받는다고 한다. 환상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내 피도 드라마틱 해질 걸 생각하니 걱정이다.


사촌 언니 한 명은 심한 갱년기 증상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언니에게 찾아온 증상은 가려움증이었다. 어떤 약, 어떤 치료를 해 봐도 듣질 않아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아쉬운 것 없는 언니에게 찾아온 갱년기 가려움증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옷도 100% 면이 아니면 입지 못했고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사촌들끼리 여행을 갔을 때도 호텔에 돌아와 온몸을 긁어대며 괴로워하던 언니였다. 쉬지 않고 찾아오는 가려움증은 괴로움을 넘어 삶에 대한 의욕마저 놓게 했다. 한 해 두 해 길어지는 증상은 적응이 아니라, 아파트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자살 충동을 가져왔다고 했다.


갱년기는 가려움증만 아니라 시력도 앗아갔다. 언니는 젊을 때 읽고 싶은 책도 많이 보라고 조언한다. 조금만 봐도 눈이 아프고 집중도 안 된단다. 돋보기는 어지러워서 책은 자연히 손에서 놔진다고 했다.

하느님은 나에게 특별한 재능은 주시지 않았지만 건강한 시력 하나는 주셨다. 1.2는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늘 내 것이었다. 그러나 연년생 출산 이후 내 몸도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져 뼈부터 근육까지 온전한 곳이 없었다. 온몸을 녹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냈음을 실감했다. 때아닌 무릎 관절염이 생겨 갖가지 보신을 한 후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고 두 아이 육아에 등과 어깨의 우루사는 필수템이었다. 한 번도 염려해 본 적 없는 시력마저 떨어져 버스 번호를 미처 확인하지 못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출산과 갱년기 최악의 컨디션은 또 그 시기만 지나면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언니들 말도 사실이었다. 지금보다 더 몸이 좋지 않았던 출산 이후를 보냈다. 계속 떨어질 줄 알았던 건강도 멈춤 후 다시 회복되었다.

작년이었다. 어느 날, 립스틱 꽁무니에 적힌 작은 글씨가 뿌옇게 보였다. 작은 동그라미 안에 깨알같이 적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내 눈을 의심하기보다 립스틱을 의심했다. 곧 그런 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결국 올 것이 오는구나. 돋보기를 써야 될 날이 머지않았구나.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숟가락으로 한쪽 눈 가리고

보지도 않는 지우에게 윙크했다


윙크 한 방에

나비가 날아간다


윙크 한 방에

비행기가 날아간다


윙크 한 방에

물고기가 날아간다


안경 없이도 온 세상이 훤-하다.



감히 말하건대 동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잘 쓴다. 어른의 동심은 인위적이라 절대 원석을 능가할 수 없다. 단지 동심과 문학을 향한 작가의 노력만이 더 우위일 뿐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부단한 작가의 노력은 피를 말릴 정도다. 반면 툭툭 던지듯 써 놓은 아이들의 언어는 감탄을 부른다. 화장하지 않아도 이쁜 청춘들과 같다.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싱싱하다.

동시 <시력검사>는 내 시력저하에서 착안했다. 중년의 시력저하와 동심을 연결시켰다. 숟가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여자 친구에게 윙크하는 녀석의 마음을 담았다. 혼자 윙크를 하며 나비와 비행기를 날리고 심지어 물고기마저 날려버리는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하늘을 나는 듯 신이 나, 안경 없이도 세상이 훤하다는 녀석이다. 감사하게도 심사위원들은 내 <시력검사>에 과찬을 해 주시며 대상으로 선정해 주셨고 세상에 내 이름을 드러내는 기회가 돼 주었다.


작품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공통점은 사물을 유심히 본다. 글을 잘 쓰고 표현을 잘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다. 낯설게 보고 새롭게 보는 걸 우선 습관으로 들여야 하고 메모해야 한다. 건강검진에서 시력검사표를 낯설게 보았다. 떨어진 시력 탓에 어쩔 수 없이 새롭게 보이기도 했을 테다. 유심히 본 결과 한 편의 동시가 탄생되었다. 생각보다 큰 상을 받아 얼떨떨하기도 했다. 이런 상이라면 두통, 치통 생리통도 달갑게 맞아야 할 것 같다. 에세이 방의 글벗들은 자궁 검사, pcr 검사, 유방검사 시리즈로 써 보라고 우스갯소리도 한다.


아쉽지만, 장풍으로 비행기를 날리고 물고기를 날릴 나이는 지났다. 윙크를 하기 위해 숟가락을 이용해야 할 일도 없을 것 같다. 주인공처럼 설렐 짝사랑은 환영이지만, 현실은 돋보기를 써야만 훤해질 날이 다가와 동심과는 더 멀어지고 있다.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고 말할 날이 곧 올 것 같다. 지금 훤한 이 세상을 맘껏 누리자.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다. 오늘이 제일 잘 보이는 날이다. 좋은 두 눈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많이 담아놓자. 날이 훤~해졌다.





* <시력검사>는 2021년 전국 동시 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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