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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May 18. 2022

꼰대와 질투 사이


어제는 지인의 집들이에 다녀왔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도심의 좋은 집에 살다가 세금 문제로 한 채를 처분하고, 조금 외진 곳으로 이사를 한 지인이다. 신축을 팔고 이 집으로 이사 들어가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일조권 좋은 집에 편의시설 잘 돼 있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다 혼자 떠나려니 미련이 많아 보였다. 내 눈엔 이 집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데, 누려 본 자만의 고민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49평, 충분히 넓고 인테리어도 부족함이 없다. 허름한 주택 사서 몸 테크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여성의 뇌는 무한한 창조이고 능력이다. 서로의 신변과 가정사를 모조리 알고 있는 사이라 더할 것도 숨길 것도 없다.

동행한 언니는 얼마 전 아들을 결혼시켰다. 아들이 서른일곱 살이나 됐으니 먼저 장가보낸 주변 친구들의 경험담을 그동안 많이 들었다. 누구네는 예단이 얼마가 왔다느니, 맞벌이를 해서 얼마를 번다느니 어느 집에는 용돈을 얼마를 받았다느니, 손주를 낳았다는 둥, 심지어 또박또박 말대꾸하며 시어머니 무시하는 며느리들 얘기도 종종 들었다. 제각각 사는 모습은 달라도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이 있었으니 그건,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손님'이라는 말이었다. 가족이라기보단 행여나 마음 상할까 봐 손님처럼 떠받드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때처럼, 며느리는 당연히 일하는 사람이란 인식으론 큰 코 닥치기 딱 좋은 세상이다.

앞치마 입고 첫날 아침 시어른들의 밥상을 차려주는 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내 딸도 못 할 일을 며느리라고 강요할 수 없고 받아먹을 밥상이 편할 리도 없다. 언니가 원한 건 최소한의 예의였다. 밥상을 차리는 시어머니 주방에 와서 숟가락 정도는 챙길 애교는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건 미처 며느리가 챙기지 못했나 보다. 그럼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면 빈말이라도 하며 다가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도 바람에 그쳤다. '그래, 첫날이니까 며느리도 어렵겠지'하고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거지를 다 마치고 다과를 가져갈 때까지 소파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아, 너도 똑같구나.'

실낱같은 기대는 첫날에 무너지고 현실을 직시했다고 한다. 그동안 친구들에게서 들은 며느리들의 실상이 내 며느리라고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물론, 첫날이라 며느리도 어색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이 안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척하면 삼천리, 왔다 갔다 육천리라 그걸 알아차리는 데 눈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기본'이라고 하며, '가정교육'이라고 못을 박는다.

친구랑 산책을 가는데 버스정류장 아가씨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다. 아무리 봐도 그건 그냥 맨살이다. 블라우스 단추를 두어 개 푼 것도 모자라 겨우 가슴만 가리고 배가 훤히 보이게 커튼처럼 양옆으로 열어놨다. 안에 살색 옷을 입었나 싶어 봤지만 그냥 맨살이었다. 벗는 거나 다름없는 차림이다. 저럴 바엔 차라리 벗고 다니는 게 낫겠다 싶은데, 내 친구는 보일 듯 말 듯한 게 멋이라며 내 편을 들어주기보단 아가씨의 멋을 이해하는 듯 말했다. '내가 너무 꼰댄가?'

얼마 전 딸이랑 쇼핑을 하러 갔다.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지만 제일 필요한 건 까만 긴치마와 티셔츠라고 했다. 늘 그랬듯 필요한 것과 눈에 들어오는 건 다르다. 정작 매장에 들어가면 제일 눈에 들어오는 건 손바닥만 한 치마다. 직장인은 직장인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만류했다. 올록볼록한 체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몸을 드러내려고 하는 딸이 못마땅했다. 겨우 무릎까지 오는 길이로 합의해 몇 가지를 사 왔다. 청춘과 꼰대의 쇼핑은 서로에게 최악이다. 즐거워야 할 시간에 눈을 몇 번이나 흘겼는지 모르겠다.

어머님과 내 나이 차이도 서른 살이 넘게 난다. 결혼하자마자 같이 살았고 지금도 아래 위층에 살고 있다. 가급적이면 며느리의 역할과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한다. 점잖은 어머님은 나를 배려해 주시고, 나도 어머님 생각을 존중해 드리는 편이긴 하지만 성격과 생활방식에 세대 차이가 난다. 바깥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 드리면 어머님 당신의 삶보다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일들이 걱정이시다. 배를 훤히 드러내 놓은 아가씨들이, 사흘들이 남자 친구가 바뀌는 다소 문란한 여자애들이 내 식구가 될 수도 있고, 손바닥만 한 치마만 찾는 내 딸도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수도 있다. 연애도 생각도 언어도 옷도 자유로운 아이들이 손자며느리가 될 거란 생각이 아찔하신가 보다. '우리'보다 '나' 위주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를 며느리로 맞을 내 걱정이시다. 만남의 축복이 제일 큰 기도이긴 하지만, 그 외에 엉뚱한 바람이 있어선 안 될 거라 다짐한다.

작가 박완서는 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커피숍 젊은이들의 거리낌 없는 애무에 다소 당황한다. 그러나 그건 작가의 질투이자 연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그들의 애무를 젊음의 권력이라고 말하며 저만치 간 후에 말한다.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너그러운 작가의 글에서 바늘구멍만 한 나를 본다. 내 꼰대는, 기본이니 가정교육이니 하는 편협한 사고의 한계일지 모른다. 이른 결혼으로, 누려보지 못한 내 청춘에 대한 삐짐과 질투 인지도 모른다. 청춘에 친절하기로 마음먹는다. 손바닥만 한 딸의 치마와 배를 훤히 내놓은 자신감 속에 든 질투를 인정한다. 터질듯한 딸의 치마가 퇴근할 때까지 무사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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