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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May 31. 2022

아카시아 미용실

아카시아 파마와 빡빡 대머리




오랜만에 비 오는 아침,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커피 한 잔 마시러 가야겠다. 할 일은 많지만 커피가 우선이다. 초록빛은 더 초록빛, 비 온 후 세상은 목욕을 하고 나온 아이 같다. 촉촉하게 젖은 몸은 본연의 색을 더 짙어 보이게 한다. 며칠 심하던 황사와 송홧가루마저 다 씻어 낸 듯하다. 비로 젖은 바닥엔 누런 송홧가루가 지도를 그리고 있다.

친구가 시간을 내준다. 전화 끊고 5분도 채 안 돼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감사하다.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도, 세수하지 않고 대충 가리고 나가도 내 허물을 탓하지 않으니 감사하다. 비 온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 동네도 아닌 곳을 굳이 커피 맛을 찾아 남의 동네까지 걸어간다. 만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할 말은 또 쌓였다.


대학교 교정에 다가갔을 무렵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데 마스크 사이로 낯익은 향이 스며든다. 퍼떡 생각나진 않지만 기억 속에 있는 향이다. 걸음을 멈추고 후각을 가동한다. 그러나 기억 속에 잠식된 향을 검색할 수 없다. 내 기억과 후각이 무디어졌음을 다시 확인한다. 후각을 닫고 시각을 열어 둘러본다. 아, 아카시아다. 어느새 아카시아가 피었구나. 벌써, 5월도 되기 전에.

활짝 핀 꽃이 비에 젖어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가지가 축 처져 풍성한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 같다. 좌절한 듯, 힘겨운 듯, 툭 어깨를 떨어트린 퇴근길 직장인 같다. 친구는 저 꽃이 아카시아란 걸 오늘에야 알았단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꽃' 껌 노래를 자연스레 불러본다.


이맘때만 열리는 미용실이다. 친구랑 나랑 번갈아가며 미용사가 된다. 선택권이 없다. 파마를 해야 한다. 중화재도 없고 롤도 없다. 오직 아카시아 줄기만 있다. 아카시아꽃은 꿀벌을 부르고 우리는 벌이 아님에도 저절로 잎사귀를 따러 간다. 윙윙대는 꿀벌들 소리를 들으며 길고 통통한 줄기 한 주먹씩을 따 와서 동그란 잎사귀를 떼어낸다. 그냥 떼어내면 심심하니 가위바위보를 하며 이긴 사람이 딱밤을 먹이며 잎을 떼어낸다. 어떨 땐 한 번에 하나도 못 떼어내지만 어떨 땐 두 잎이 한꺼번에 떨어지기도 한다. 양옆으로 벌어진 잎사귀를 다 떼어내는 것만도 한참 걸린다. 먼저 떼든 늦게 떼든 승자도 패자도 없다. 파마를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여린 줄기는 쓸모가 없다. 머리를 말고 꼬불 해질 동안 지탱할 힘이 없다. 너무 뻣뻣한 줄기는 반으로 접으면 툭 부러져서 쓰지 못한다. 적당히 탄력 있는 줄기여야 반으로 접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반으로 접은 줄기 사이로 머리카락을 넣고 아래로 돌돌 말아 올린다. 머리 밑까지 단단하게 말고 나면 동그랗게 모아 줄기 사이에 끼워 고정시킨다. 손님은 미용사가 머리 말기 좋도록 줄기를 깨끗이 다듬어 손에 들고 기다린다. 뒷머리부터 옆머리까지 한 줄씩 몇 고랑을 만들어야 파마가 완성된다. 옆머리를 당겨 올려 눈까지 쪽 찢어진다. 온통 동그랗게 말린 머리에 줄기 끝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이제 파마가 잘 나오길 기다리면 된다. 중화재도 없고 보자기도 없다. 누가 보든 상관없다. 부끄러운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머리를 말고서 온 동네를 뛰어다닌다.

두 시간쯤 지나면 미용사처럼 파마 하나를 슬쩍 풀어 상태를 확인한다. 아직 마음에 드는 고불기가 안 됐다. 다시 말아 올리고 더 놀아야 한다.

"애들은 파마하는 거 아니라."

딱 한 번만 파마를 해 달라고 졸라도 엄마는 들어주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멀쩡한 머리에 파마할 형편이 아니었다. 괜한 부탁을 하고 혼자 마음 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카시아 파마밖에 없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잘 알아서 우리끼리 파마에 더 정성을 들였다.

하나씩 줄기를 풀어본다. 탱실하게 말린 머리가 제법 파마에 가깝다. 머리를 흔들면 금방 풀어질까 봐 조심한다. 흔들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니 어깨마저 굳었다. 손을 대면 금방 풀어지니, 보기만 해야 된다. 머리도 감으면 안 된다. 하지만 수고는 길고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엄마처럼 내일, 모레까지 가는 파마이면 좋겠지만 물먹은 솜처럼 금방 주저앉아 버린다.


길 건너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언니들은 나를 앉혀놓고 밥풀이 묻었다며 군데군데 자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발사를 했어야 했는데, 언니들이 주인을 한 건 아직 가위질을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머리만 만져주면 잠이 오는 걸 보면, 그때도 양쪽에서 언니들이 머리를 자르자 금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떠 거울을 보니 내 머리가 빡빡이가 되어 있었다. 잘 자르지도 않은 그야말로 '영구' 말이다.

대여섯, 어린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고 집으로 돌아갔다. 놀란 엄마는 누가 이렇게 잘랐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경운기 뒤로 숨어버렸다. 언니들은 아마도 엄마에게 혼이 났을 테다. 딸을 그렇게 만든 언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다. 나는 내 머리도 감당이 안 돼 언니들이 어떻게 됐는진 기억이 없다.


50년 가까운 내 역사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50번에 가까운 봄을 보냈고 50번에 가까운 겨울을 보냈다. 한 계절에 한 가지 기억만 남아도 봄 시리즈 50편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날이 다 기억나지 않고, 모든 날이 다 저장되지도 않았다. 남은 기억은 내게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파마를 한 기억은 초등학생 때의 봄날이고, 빡빡 대머리는 대여섯의 겨울이었다. 그건 내 역사에 911 테러 같은 사건이었고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자 추억이다.

마흔아홉의 봄날은 또 어떤 기억으로 남겨둘지 과거가 될 오늘을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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