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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Jun 28. 2022

비명



마트보다 시장을 많이 간다. 적은 금액으로 훨씬 실속 있게 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골이 된 가게라 편하고 만만하다. 이사 오기 전 동네에, 조그마한 시장에 채소를 팔고 김치를 담가 파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재개발로 하나둘 이주해 나가자 채소가게 물품도 싱싱한 채소 대신 염장된 것들 위주로 바뀌어 갔다. 그래도 요리하다가 갑작스레 필요한 게 있으면 얼른 달려가는 곳은 그 채소가게였다.


그날도 뭔가를 사기 위해 가게에 들렀다. 김치를 담고 계셨다. 거의 마무리가 돼가는 것 같았다. 고무장갑 뺏다 끼웠다 하기 번거로우실 것 같아 잠시 기다리겠다고 했다. 곁에서 도와주시던 할머니께서 젊은 시절 젖소 농장을 하신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머니는 소에게서 인생을 배웠다고 하셨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그 안에도 서열이 존재한다고 했다. 우두머리는 절대로 음식도 많이 먹지 않고 그 행동거지가 점잖다고 했다. 반대로 못난 소는 툭하면 뿔로 들이받는 행동거지를 해 주인 눈에도 자연스레 서열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 눈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그들 나름의 몸짓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소 한두 마리만 키우던 우리 집에선 볼 수 없던 장면이다. 내가 어려서 미처 몰랐을 수도 있다.

 

한 번은 농장을 새로 지어 소를 모두 옮겨야 했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트럭에 소를 싣고 옮겨야 했는데, 한꺼번에 그 많은 소를 다 옮기지 못하니 한두 마리씩 싣고 옮겼다고 했다. 그때마다 소들이 울며불며 난리였다고 했다. 소 시장에 팔려 가는 게 아니라, 이사 가는 거라고 어떻게 알려줘야 했을까? 먼저 트럭에 실려 가는 소나, 뒤에 남는 소나 그것이 이별이라고 생각해 발버둥을 치며 그 큰 눈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 같은 일을 반복했을 테니, 소들의 불안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다 이주를 마치고 마지막 소 한 마리만 남게 되었을 땐, 그 울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했다. 고삐를 끊고 튀어 나갈 정도로 발버둥을 치더라며 놀라워하셨다. 떠나가는 소와, 남은 한 마리의 비명이 지켜보는 사람까지 딱하게 느낄 정도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걸 보며 ‘짐승만도 못한 놈’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알았다며, 그날의 광경을 떠올리는 듯 말씀하셨다. 듣는 나도 장면이 연상되어 애잔해졌다. 말 못 하는 짐승이 사람보다 나을 때가 많더라는 말씀 하시며 그 무리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다.

 

지난 주말, 시골에서 장어를 구워 먹고 TV를 보다가 11시쯤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이 전날 과음한 덕에 술자리가 일찍 끝났다. 거실과 방에 이불을 깔고 불도 다 끄고 모두 자리에 누웠다. 열어둔 창문 밖에서 개구리가 합창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추억의 소리다. 도대체 몇 마리쯤 될지 상상해 보며 즐거이 귀 기울여 들었다. 쉬 잠이 들지 않아 옆에 누운 올케언니와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닭장 쪽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닭이 내는 소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꼬꼬댁 꼬꼬'하는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심상찮은 낌새에 오빠들도, 나도 일어났다. 닭장에 짐승이 침입한 모양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조그마한 구멍만 있어도 들쥐며 짐승들이 들어가 병아리를 채간다. 닭장을 지을 때 제일 주의해야 하는 일이다. 오빠들이 바닥부터 꼼꼼하게 단속해 만든 닭장인데도 빈틈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얼른 달려갔지만,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뒤따라 나간 오빠는 어느새 후레쉬를 들고 있다. 나도 부엌 뒷문에서 닭장을 향해 위협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가로등 아래 시커먼 어둠 속으로 고양이보다 몸이 긴  짐승 두 마리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족제비다.

얼마 전에 태어난 병아리 7마리가 삐악 거리고 있다. 족제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테다. 공격을 개시하기엔 너무 환해, 불이 꺼지길 기다리고 있었을 테다. 집안에 불이 꺼지자 침입했는데, 난데없는 인간의 공격에 혼쭐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닭의 비명은 그치질 않는다. 족제비가 목을 반쯤 꺾어 놓고 가 목이 덜렁거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빠들 말로는 물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닭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도 처음 본 현장과 닭의 비명이 충격적이라 쉬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좀체 그치지 않던 닭의 비명이 이제 꼬꼬댁거리며 안정을 찾아간다.  목이 물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그제야 든다.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지금부턴 경계에 들어가겠다는 다짐인듯하다. 밤새 새끼들을 지키겠다는 어미의 결심 같다. 가축우리에서 거친 야생을 본다. 닭은 여전히 떨고 있었을 텐데, 나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잠이 들고도 닭은 밤새 울었고, 새벽녘에 족제비가 한 번 더 왔다고 오빠들이 말했다. 그러나 새벽을 알리는 울음은 여전했다. 어젯밤 비명에 약간 목이 쉰 것 같기도 했으나 늦잠도 없이 새벽을 알렸다. 훤한 낮 동안은 별일 없을 테니, 여느 날보다 반가웠을 새벽 인지도 모른다.

 

낳자마자 알을 거둬가는 주인이지만, 먹이를 주고 울타리를 손질해 주는 주인을 신뢰하는가 보다.  우리 중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는 듯한 믿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입으로 내장을 다 토해낼 정도의 사력이었다. 날렵한 족제비로부터 새끼를 지키기 위한 어미의 절규였다. 엄마 아빠 둘만 남은 집 닭장엔 이미 피바람이 불었는지도 모른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닭의 비명이다.

 

우리도 그 비명 같은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일에 바빠 자식들 돌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땀과 눈물이 모두 비명이었음을 안다.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음을 안다. 그 몸이 이제 다 닳아 마지막에 다다랐음을 본다. 여든여섯 번째 아빠의 생일이 기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단단하던 몸이 야위어 쓰러질 듯하다. 족제비 마냥 우리가 그 몸을 다 빼먹은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하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축나지 않고 계시기를 바라 본다. 난데없는 비명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바람을 내 본다.




덧) '비명'은 매일 메일 은자 6-14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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