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이 되는 해에 아빠는 그동안 기록해 두셨던 글들을 모아 '정심선행(正心善行)이란 제목을 붙여 제본 출간을 하셨다.
번번한 노트 한 권 없이 달력 뒷장이나 우리가 쓰다만 공책에 조각조각 인생을 기록해 두셨다. 바쁜 농사일을 하시는 틈틈이 방바닥에 엎드려 기록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같으면 노트라도 제대로 된 걸 하나 마련해 드렸을 텐데 어린 우리는 그걸 헤아리지 못했다.
두서없이 써 두신 기록들을 정리하여 60년 당신의 삶과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 가문의 족보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두셨다. 유난히도 고달픈 일들 많이 겪으셔서 기쁨보다 슬픔과 애환이 더 많았던 삶의 기록이었다. 환갑이 지나고 찾아온 위암은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몸이 약해지는 건 당연함이고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없으셨다. 자연히 기록에 대한 욕구도 삶에 대한 집착도 없이 시간을 보내셨다.
작년, 셋째 오빠가 교장 승진을 하고 조카가 5급 행시를 패스하고, 내가 동시 작가로 등단하는 겹경사가 일었다. 자식의 성과는 예상치 못한 아빠의 에너지가 되었다. 환갑 이후, 여든다섯까지의 삶을 정리하고픈 '글'에 대한 희망이 다시 돋아났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놔버린 글을 다시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오빠와 내가 용기를 드렸고, 아빠도 힘을 내 보기 시작하셨다.
"도저히 글이 안 된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전화할 때마다 아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생각만큼 글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고, 약한 몸은 더 약해질 지경이었다. 멀리 있어 지켜봐 드릴 수도 없고 도움을 드릴 수도 없었다.
지난달, 아빠는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며 원고 뭉치를 오빠에게 다 보냈다 하시며 미련과 홀가분함이 묻은 말씀을 하셨다. 환갑 이후에 어떤 것들이 더 추가되었을지 궁금했다. 그동안 오빠가 워드 작업을 했고 어제 나에게 파일을 보내왔다.
한 꼭지 분량이 일정치 않아 뒤죽박죽이다. 어떤 건 한 페이지도 안 되고 어떤 건 두 페이지도 넘어간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아빠에게 요구하는 게 무리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사진도 첨부하고 글도 조금 추가되어 이전보다 알찬 한 권이 될 것 같다.
일흔에 친구분들과 중국 여행 간 이야기, 향교 다니시는 이야기, 새로 집 지은 이야기, 방송 출연한 이야기, 서예 교실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이전 글에 없었던 막내 오빠와 나의 결혼 페이지도 추가가 되었다.
결혼 연도도 잘못됐고 '외도' 오타도 있지만 마지막 '영원히 영원하길 빌고 또 빈다'. 는 글을 읽는 순간 눈앞이 흐릿해진다. 이 한 줄이 한 권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한 줄이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시고서 뭘 써야 할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며 머리가 완전히 멍청이가 됐다며 자책을 하셨다.
"아빠, 글쓰기 어려우면 우리에게 편지 한 장씩 써줘도 돼, 글은 아빠보다 우리가 더 많이 읽을 거잖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남기는 편지, 돌아가신 후에도 두고두고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제안했지만, 아빤 그것조차 어려워하셨다. 결국 아빠는 원고를 털었고 기대했던 편지는 하나도 없었다. 그 속에 든 '영원히 영원하길 빌고 또 빈다'가 나에게 전하는 아빠의 메시지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아빠란 소리도 하지 마라".
'김 서방'을 사위로 맞을 수 없어 아빠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내셨었다. 점잖은 집안에 일어나는 불행은 유독 김 씨와의 인연에서만 일어났다. 징크스라기엔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한 일이라, 내 무의식에도 김 씨와의 결혼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운명은 김 씨의 덫에 걸려 험난을 예고했다.
'김'씨랑 결혼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사귀었냐는 원망이었다. 아빠 전화를 끊고 김 서방과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빠한테 이런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나만 포기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강적은 김 서방이서 무뚝뚝한 고집만큼이나 반드시 임 가네의 사위가 되고자 기를 썼다.
'아빠란 소리도 하지 마라'라는 말은 조금 더 철이 들고서야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 말을 해석하기에 23살은 턱없이 어렸고 그 속에 든 깊이도 헤아릴 수 없었다. 반대하던 결혼을 승낙했지만 늘 노심초사하셨을 테다. 행여나 다른 이들처럼 딸이 비극의 주인공이 될까 봐 전화할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을 테다. 이제 이만큼 오고 나서 보니 '항상 신뢰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낸다'라고 인정하시고 걱정을 놓으신 것 같다. 하나뿐인 딸이 그동안 두 분께 끼친 걱정의 무게를 이제야 알게 된다.
아빠는 스스로의 데드라인을 작년으로 잡으셨지만, 올해까지 고만고만하게 건강을 이어오고 계신다. 위암 수술 후 몸의 기력을 계속 빼먹어 뼈만 남았지만 나에겐 유일무이한 큰 존재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2500년 역사를 이어오듯, 아빠의 '정심 선행'은 아빠보다,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빠가 가시고 내가 돌아가는 날까지 아빠의 글은 나에게 에너지와 추억이 될 것이고 주기적인 눈물이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선 곁에 붙어 앉아 그럴싸한 한 권의 책이 나오도록 힘을 보태 드리고 싶지만 여전히 핑곗거리가 많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정리를 하셔서 아빠도 조금은 후련하리라 여겨진다. 부디 좋은 책이 되어 작은 기쁨이라도 누리실 수 있길 바란다.
약한 몸을 가지고도 이렇게 완성하시고자 한 집념은 우리에게 하는 유언임을 안다. 하지만 아빠의 우려와 달리 거룩하게 살아오신 당신의 정심선행은 유전자처럼 이미 우리 속에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으신 정성과 바람을 아빠인 듯 가슴에 꼭꼭 새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