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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Aug 08. 2023

화장실이 어디죠?

어머님의 영어 공부


어머님이 영어 공부를 하시겠단다. 아이들 가정 방문 학습지를 좀 알아봐 달라고 하신다. 

늦깎이로 간 '어머니 중,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유럽 여행을 가자고 하신단다. 어머니보다 젊은 분이 대부분이고 여든 넘으신 분은 어머님이 유일하다고 하신다. 연세는 높으나 체력이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리와 허리는 지금도 곧고 정정하시다. 체중도 줄지 않았고 근육도 아직 빵빵하시다.

"괜히 젊은것들 따라 댕기다가 욕볼까 봐, 갈까 말까 생각 중이다."

"욕보더라도 다녀오세요. 어머님.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가시겠어요."

괜히 우리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스위스 여행이 취소된 게 아쉽기도 해 더 적극적으로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건강도 타고났지만 승부욕도 대단하시다. 자존심이 강해, 지는 걸 싫어하신다. 금강경을 써도 남보다 많이 써야 하고 복지관  '한문 교실' 공부도 설렁설렁하지 않으신다. 유럽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나니 영어가 신경 쓰인다. 건강과 함께 영어도 과시하고픈 마음이 있으신 것 같다. 적어도 '화장실이 어디죠?' 정도는 물을 수 있어야 한단다. 배움의 이유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 해결이라는 게 우습지만, 동기부여되기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요즘은 앱이 잘 나와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기계 말고 당신 스스로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시다.

10년 전 학교에서 배운 영어는 알파벳을 제외하곤 거의 다 잊어버렸다. 마음이 바쁘다. 

영어 간판을 찍어와 물어보고 지하철 영어 안내 방송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하던 열의는 식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월부터 12월까지 읽고 쓰던 날은 과거가 돼 버렸다. 혼자서는 공부하기 어렵다는 걸 아신다. 바쁜 며느리에게 일일이 물어보러 다니는 것도 편치 않다. 생각해 낸 것이 학습지 선생님이다. 그걸 좀 알아봐 달라고 하신다. 마침 글쓰기 벗 중 학습지 회사 지국장님이 있다. 이런저런 궁금한 점을 상담하고 신청했다.

'적당한 때'라는 정의는 누가 내렸을까? 요즘 세대들은 주도적으로 때론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기 결정을 존중하지만, 내가 청춘일 때는 내 의지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따라, 규범에 떠밀리듯 결혼하고 출산했다.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고 나 역시 아이들에게 종종 흘린 말이기도 하다. 

어머님은 열네 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셨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양반이라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어린 당신 보기에도 무능해서, 애살 맞은 당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신발 밑창에 고무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지켜보던 사장은 공장 일은 아직 힘들겠으니 사택에서 주방일을 도우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어려운 와중에 반가운 말이었다. 사장네 인심이 야박하지 않아, 한참 입맛 달던 때 형제자매들 눈치 보지 않고 굶주린 배를 채웠고 남은 반찬을 몰래 싸 와 식구들까지 먹였다고 했다. 

공부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결혼하고 보니 헤쳐나가야 할 일이 첩첩산중이었다. 줄줄이 아이 다섯을 낳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또다시 가장이 되어야 했다. 억척이 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다. 아무도 어머님 편을 들지 않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만은 어머님 편이 돼 주었다. 얼떨결에 산 땅을 3개월 만에 곱절로 되팔았다. 그걸 시작으로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고, 줄줄이 들러붙은 친정 식구와 때마다 손 벌리는 시동생들 뒷수발까지 해냈다. 남편 믿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강단이 생겼다. 그러나 서류를 쓸 때마다 아버님을 앞세워야 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자식들 다 키워놓고는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이번엔 아버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열등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나보다 더 잘난 부인이 글마저 안다면 당신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영어 사전 펴 놓고 공부하는가 싶으면 몰래 책을 갖다 버리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서야 드디어 '어머니 학교'에 입학하셨다. 입학식, 소풍, 시험, 수학여행, 운동회, 수업 마치고 노래방을 들락거리던 그때가 당신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회상하신다. 공부는 따라가기 벅찼지만, 평생의 한이어서 학교에 다니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다. 왜 의무교육이 있는지, 왜 사람이 공부하고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겠다며 한참 지나버린 당신 삶을 돌아보셨다. 

여든셋이 된 어머님께 다시 때가 왔다. 어릴 때는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고 결혼하고는 생존이 급했다. 일흔이 넘어서야 때를 만났고 여든이 넘어 다시 때를 자처하신다. 

영어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40대 학생은 가르쳐 봤지만, 80대는 처음이라 하신다. 단어마다 소리를 들려주는 마우스 펜에 벙글벙글 하신다. 다시 때가 찾아온 것이, 또 이렇게 공부할 방법이 있어서 마냥 즐거우시다. 선생님만 오시면 순한 양이 되던 어릴 적 아이들을 보는 듯하다. 이 연세에 공부하겠다는 어머님의 들뜸이 귀엽다. 하루 종일 수학 문제를 풀던 그때처럼 집중하실 테고, 5개월 후엔 '화장실이 어디죠?' 정도는 거뜬히 물어보실 수 있을 것이다. 

검정고시로 초등과정을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시자 우리는 나이 든 어머님의 학부모가 되었었다. 영어 선생님을 맞이하니 그때처럼 다시 학부모가 된 듯하다. 한 달 수업비와 마우스 펜 비용 등 10만 원가량을 '등록금'이라며 결제해 드렸다. 공부에 대한 기대감과 생각지 못한 학부모 찬스로 웃음이 떠나지 않으신다.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너는 못 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라고 한다. 국밥집을 할 때 동시를 쓸 거란 상상은 하지 못했다. 에세이를 쓸 거라는 상상, 소설을 배울 거라는 생각 역시 하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일을 연속으로 벌이더니 이젠 뻔뻔스럽다 못해 아예 익숙한 흉내를 내고 있다. 동시에 이어 동화, 시 등 또 무엇을 배워볼 지 뒤적거리고 있다. '내가 어떻게 감히?'라는 한계도 두지 않기로 했다. 남에게 하지 않는 말은 나에게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어머님이 당신의 연세를 핑계 대지 않듯 내 걸음이 나를 붙잡게 해선 안 된다.시작하기에 늦을 때란 없다. '때'라는 게 누구에게나 천편일률적이지도 않다. 내가 그렇고 어머님이 그렇듯 생각만이 오직 한계일 뿐이다. 늦었다고 단정 짓는 마음만이 오직 방해될 뿐이다. 영어 공부에 여든셋은 아무런 핑계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벽일지 모를 일을, 누군가는 그냥 시작할 뿐이다. 오늘은 남은 생에 가장 젊은 날, 시작하기 제일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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