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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Aug 08. 2023

딱 보면 알아



조르바를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출판사의 다른 번역본을 읽기에 익숙하지만 매번 새롭기도 하다.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이번 책에선 찾을 수 없기도 했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문장이 새롭게 오기도 했다. 특히나 이번 번역본에선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유일하게 내가 아는 존재'라는 조르바의 대사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말로 번역돼 있어 실망이었다. 처음에 이 번역본으로 읽었다면 어쩌면 조르바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면, 새롭게 눈에 띈 곳도 많았다. 이번엔 문장이라기보다 인물을 나타내는 작가의 시선과 구성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첫 페이지에서 두목과 조르바가 만나는 장면이다. 조르바의 레이다에 걸려든 젊은 남자. 작정하고 그에게 접근한다. 거창한 것을 공약하지도, 허풍떨며 과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기막힌 수프를 끓일 줄 안다'라는 말로 자신의 쓸모를 어필한다. 훗날 광산을 떠나기 전 두목이 조르바에게 그날을 회상하며 묻는다. 

"대체 어떻게 그걸 눈치챘어요?"

"그저 내 머릿속에 턱 떠오르는 거니까.... 설명할 방도가 없어요."

작가는 수프와 조르바를 연결 지으며 첫 장부터 이미 조르바의 통찰을 예고했다.  

자기 계발을 시작하고서 1:1 온라인 코칭 받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어떻게 기획을 잡아 글을 쓰고 투고해야 좋을지 고민할 때였다. 글도 기획도 배워 본 적 없고 물어볼 곳도 마땅찮아 진척되지 않았다. 그 타이밍에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상담에 들어갔다. 미팅이 시작되고 두어 마디가 오갔을 뿐인데 미처 꺼내지도 않은 첫 번째 고민이 해결되고 두 번째 질문에도 간단한 해법을 주셨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담은 금방 끝났고 나는 그분의 조언대로 기획 방향을 잡고 투고해 성공했다.

고민을 해결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리더의 '통찰력'이란 단어를 몸소 체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근태 작가의《일생에 한 번은 고수를 만나라》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진짜 고수는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다. 한 권 내내 고수와 하수를 비교해 보여줘서 적잖이 움찔거리며 읽은 책이다. 

직관적이다. 딱 보면 안다. 호기심이 많다. 자유롭다. 심플하다. 화내지 않는다. 긍정적이다.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작가가 말하는 고수의 특징이다. 심플하고 자유롭다! 그가 말하는 고수에 조르바가 딱 들어맞는다. 요즘 사회 분위기상으론 천하에 몹쓸 날라리지만 괜히 자유로운 영혼, 철학자라 이름 붙은 게 아니다.

작가는 기업의 회장들로부터 인재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냐는 물음에 작가는 "딱 보면 견적이 나온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인상을 살핀다. 누군가는 단순히 눈 코 입을 보지만 누군가는 관상을 보고 누군가는 마음과 머릿속까지 읽는다. 작가가 한눈에 인재를 알아보는 것처럼, 조르바는 젊은 두목의 가치를 읽었고 그에게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던진 미끼는 영 터무니없어 보이는 '수프'였다. 시답잖은 미끼가 먹힐까 싶지만, 두목은 흔쾌히 미끼에 걸려든다. 두목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맛있는 수프였다. 그걸 짧은 순간에 알아내는 조르바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고수이다. 딱 보면 안다는 고수의 혜안이자 통찰이다.

연예인들이 밥숟갈을 들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집마다 벨을 눌러 밥 한 끼 달라고 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실제 가정에 들어가 그 댁의 음식을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봤었다. 파주인 걸로 기억하는데, 고가의 전원주택이 즐비한 마을이었다. 이층집이었고 악기 연주하는 아이가 있는 가정이 소개되었다. 음악에 재능은 있는데 여러 악기 중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관현악단 지휘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지휘자가 아이를 보자마자 "ㅇㅇ악기 해야겠네"라는 말씀하셨다고 했다. 악기 연주시켜 본 것도 아니고 이야기 나눠본 것도 아니라고 했다. 지휘자 눈엔 그냥 딱 보인 것이다. 오래도록 한 분야에서 고수가 되신 분들 특징이다. 몸의 형태와 분위기, 기운만 봐도 악기가 연결되는 경지다. 

법륜 스님은 어떻게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고생을 많이 해 보면 자연히 알게 돼요."라고 말씀하셨다. 감옥에서 고문당하면서 죽음 앞에 나약한 자신을 보았고, 밤새 악랄했던 고문관도 그저 밥벌이를 수행하는 중생이라는 역지사지를 깨달았다고 하셨다. 굴곡 없는 삶에서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실패와 좌절과 고통 속에서 통찰이란 열매로 탄생한다. 평범한 우리 삶에서도 단맛뿐 아니라 쓴맛도 어느 것 하나 쓸모없지 않음을 알아가고 있다.

딱 보면 안다. 긴말이 필요 없다. 긴 글이 필요하지도 않다. 핵심을 안다. 지금 읽는 카파라이터의 글처럼 고수는 말과 글이 짧고 군더더기가 없다. 

나이 먹어가면서 주의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말의 길이다. 지지부진 말이 길어지기 일쑤인데 핵심만 말하고 멈출 수 있다면 그야말로 통찰에 이르는 여정일 테다. 나이가 벼슬인 양 점령하는 무지를 늘 인지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 '멋진 나'에 통찰이란 단어 하나 꽂을 수 있길 흠모한다. 그 여정이 쉽지 않은 길이란 걸 알지만 첫 번째 과제로 말의 길이에 의식을 둔다. 

통찰도 고수도, 말의 길이도 어떻게 습득하고 조절할지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땐 책에서 길을 찾으라고 한다. 조르바처럼 몸으로 익힐 용기가 없어 책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행동하지 않는 두목이라고 같이 비웃던 내 귀가 간지럽다. 멀리서 조르바가 내 뒷담화하는 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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