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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Aug 08. 2023

섬스러운 년


통영 '욕라떼' 전문점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라떼아트 위에 초코로 욕을 써 주는 게 입소문이 난 이유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수십 개의 각기 다른 욕라테 리뷰가 올라와 있다. 

어떤 일이든 오래 하고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되기 마련이다. 보아하니 라떼 사장님도 욕 전문가가 된 모양이다. 지름 10cm도 안 되는 커피잔에 외모 비하부터 육두문자까지 가지각색의 원색적인 욕이 쓰여있다. 웃고 넘어갈 만한 욕도 있지만, 수위를 넘는 것도 있다. 이를 용인하는 리뷰어들의 관용은 관심 받고 싶어서인지 너그러움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예쁜 그림 대신 나를 위한 욕을 호로록 마시는 건 어떤 기분일까? 

굳이 뭣 하러 욕을 찾아 거기까지 가는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 음식점에도 단골이 많다고 하니, 인간은 가끔 이해 안 되는 일을 재미있어하는 이상한 존재가 틀림없다. 어쩌면 그 무의식엔 남들이 보는 객관적인 내 모습이 궁금한 까닭이 아닐까? 일면식 없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나, 아무런 정보 없는 상대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말이다.

실제로 욕라떼에 다녀온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섬뜩했다.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찾아갔다고 한다. 한 번은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한 번은 쉬는 날이라서 실패하고 세 번째 방문에서야 드디어 욕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지인은 평소에도 '내 잘난 맛에 산다'라고 말하는 자존감 강하고 소신 있는 언행을 하는 똑소리 나는 사람이다. 카페에 들어가 한 말이라곤 주문을 위해 주고받는 몇 마디가 전부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년'이란 욕을 받았다고 한다. 욕을 쓰기 위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니고, 사장을 위해 정보를 흘린 것도 아니다. 오직 몇 마디 대화, 음성의 높낮이와 톤, 인상과 차림새 등으로 사장은 그 짧은 순간에 사람을 간파해 멋들어진(?) 욕을 선사했다. 그는 혹시 점쟁이이거나 역술가가 아닐까? 아, 그래. 이래서 모두 찾아가는 거구나. 이 달콤 쌉싸르함이 핫스팟이 된 이유구나. 욕이 사업 아이템이 되다니 재미난 세상이다.

김승호 회장이 입국 카드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 '생각사'라고 적었다던 게 생각난다. 그는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욕라떼 사장은 욕을 쓰기 위해 자연히 '관찰사'가 되었을 것 같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 메뉴를 주문하는 짧은 시간에 고객에게 어울리는 멋진 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뜨거운 라테가 식기 전에 욕까지 올려야 하니, 관찰과 생각과 손동작이 굼뜰 수 없다. 자연적으로 관찰사를 넘어 관상가, 심리 전문가, 예술가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같이 간 친구의 라떼다. 친구는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유독 섬에 대해선 좋지 않은 기억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섬에서 자란 것이 열등감으로 남아 누군가 고향을 물어본다거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고 했다. 심지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나 섬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미련도 없이 헤어졌다고 하니, 섬에 대한 그녀의 불편한 감정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다. 

'섬스러운 년' 

놀랍게도 그녀가 받은 잔엔 '섬스러운 년'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몇 번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받은 욕이 하필이면 아킬레스건과 같은 욕이었다. 하루 재미난 이벤트를 노렸으나 오히려 상처만 된 진짜 욕을 받았다. 그녀 역시 어떠한 정보도 흘리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받아 든 라떼다. 

숨기고 싶었지만 제대로 숨겨지지 않았다. 귀신 같은 사장 눈에 그녀는 섬스러워 보인 것이다. 몸 구석구석 섬이 묻어 있어 자연히 드러났다.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죽기 살기로 보고자 하는 사람 눈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양이다. 달콤한 라떼가 씁쓸했을 테다.

글을 쓰는 이유 혹은 글을 쓰는 효용은 '인간과 현상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제일 우선은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나아가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과 주변인을 돌아보게 된다. 인물과 현상에 대한 고찰이 결국 글의 전부다. 나와 주변 인물과 현상, 나아가 더 큰 우주를 보게 되는 것이 글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상처는 상처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되고, 감사는 감사해서 더 깊이 그 시작점을 찾아 들어가게된다. 그러다 보니 사람도 사물도 유심히 보게 되고 인과관계에 관한 생각도 절로 많이 하게 된다. 글을 쓰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까지 살피는 재미를 얻게 되었다. 욕 카페 사장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관찰이 습관이 되어 딱 보면 딱 나오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일 테다.

 '나의 책이란 나의 한계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라는 신형철 작가의 글이 생각난다. 내가 아는 것만 쓸 수 있는 게 내 글이고 책이다. 내 글의 한계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내가 가진 전부이자 우주다. 어느 한 조각 떼내고 싶다고 베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섬스러운 그녀가 삶의 출발점이자 절반의 삶인 섬을 거부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내가 내 고향 산청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라테 사장이 써 준 섬스러운 년은 어쩌면 섬의 치부가 아니라 아름답고 독보적인 섬스러움일 수도 있다. 그 너른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와 뙤약볕과 강한 생명력을 가슴으로 끌어안는다면 얼마나 풍요로울까? 상처와 외로움과 눈물마저 같이 데려갈 줄 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인생일까? 나무와 산밖에 볼 수 없었던 나로선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섬스러움을 숨기지말고 마음껏 펼치고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 본다. 

욕라떼 사장에게 가면 나는 과연 어떤 욕을 받게 될까?

'보기보다 질긴 년, 동시 쓰는 늙은 년,'

상상해보니 재미난다. 어쩌면 나도 섬스러운 그녀처럼 상상치도 못한 욕을 받아들고 난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내가 아는 내 모습과 내가 모르거나 숨기고 싶은 모습마저도 밉지 않게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거부한다고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나이 먹어 좋은 점이다. 청춘도 패기도 한물 빠진 중년은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것보다 가진 것을 적절히 다루는 데 더 능숙하다. 모자라고 부족한 걸 부정하지 않고 능히 안아주는 게 인생이란 걸 안다. 그것마저 사랑하는 게 행복이란 걸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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