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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Aug 08. 2023

명선 한약방


<다누라> 정기 모임이 매주 수요일 오후 4시에 있다. 우리 중에 유일한 직장인 언니의 퇴근에 맞춘 시간이다. 매주 있는 정모가 거창할 리 없다. 샌드위치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 가까운 수다를 떨고 헤어지는 게 전부다.

어제, 이번 달 마지막 정기 모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분기별로 갖는 게 정모이건만 우리처럼 매주 모임을 하는 건 여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가관인 건 정기모임 외에 번개팅이 또 있다. 햇볕이 좋아서, 바람이 살랑거려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등 '보고 싶다'라는 말은 교묘히 피해 모임을 제안한다. 십중팔구는 전원이 삼십 분 안에 다 모인다. "약속도 없나?"라며 곧바로 챙겨 나오는 서로를 타박하지만,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경상도식 인사일 뿐이다.  

어제는 명선 언니가 쑥국 끓이고 소고기 수육 해 놓을 테니 집에서 정모하자는 카톡을 올렸다. 거절과 사양이 예의가 아니라며 뻔뻔한 하트를 날렸다. 부군(夫君)은 이미 10년 전에 하동 본가로 귀농하셨고, 군 제대한 아들도 억지 분가를 했다. 같은 부산에 살면서 굳이 분가시켜야 하느냐는 시어머님의 넋두리에도 '독립과 자립'이란 명분을 내세운 결단이었다. 우리의 아지트로 이보다 더 훌륭한 공간이 있을 수 없다. 사실, 아들의 분가를 제일 반가워한 이는 우리일지도 모른다. 

명선 언니는 우리 중에서 덩치는 제일 작지만 품은 가장 큰 사람이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으로 근무하셨기에, '쌤'이란 호칭이 익어 아직도 언니라 부르기 어색하다. 부부 둘 다 고정 수익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따지자면 우리 다섯 중 가장 빠듯할 수 있는 조건이지만, 단 한 번도 돈 투정을 한다거나 돈 쓸 일에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오히려 1인 가구에 백수라 지출이 적음을 더 강조하는 사람이다. 우리 중 자본주의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제법 큰 돈 드는 '감이당' 인문학 공부를 몇 년째 이어가며 읽고 쓰는 거룩한 삶을 축복처럼 누리고 있다. 하동 너른 들판에서 자란 덕분인지, 딸 부잣집의 자애로움인지 나로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아량이다. 

돼지고기만 해도 충분할 걸 소고기 아롱사태 수육을 했다. 담백한 육질에 중간중간 낀 아롱 힘줄이 쫀득한 맛을 더한다. 이 수육에 길들면 돼지고기 수육은 느끼해서 못 먹을 것 같다. 이 댁의 특미, 배추김치는 언제 먹어도 달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은 빗물마저도 좋을 것이다. 배추에 비밀이 있는지, 양념에 비밀이 있는 건지, 손맛이 비법인지 알 수 없다. 시퍼런 배추김치 이파리에 고기 한 점 올리고 직접 키워 담은 매실장아찌 반쪽을 올려 먹으면 감탄과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 와중에도 안주인은 더 내놓을 게 없는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머위 잎 삶아 둔 게 또 등장한다. 요맘때 잠시 맛볼 수 있는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머위 쌈이다. 한두 장으론 감질나서 성에 차지 않는다. 손도 크고 입도 크니 서너 장을 포갠다. 귀한 걸 헤프게 먹는다는 눈치도 못 본 체한다. 그 위에 김치와 수육을 더한다. 향락이 따로 없다. 건배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봄과 음식과 웃음의 하모니다.

벌써 배는 부른데 메인 요리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쑥국이다. 콩가루를 많이 넣어 걸쭉해졌다며 미리 염려를 고백한다. 감히 맛을 논할 주제도 못 되지만, 그 어떤 결과물에도 냉정한 평가는 예의가 아니다. 쑥국은 몇 년 전 사촌 언니가 끓여줘서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이맘때 잠시 잠깐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해마다 그 맛 내기에 실패하고는 시도하지 않았다. 수육보다 오히려 더 기대되는 쑥국이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귀하게 받아든다. 언제 또 맛볼지 알 수 없어 눈으로 먼저 음미하는데 벌써 옆에서 감탄이 나온다. 한 숟가락을 떠 느.리.게 맛을 본다. 보신이다. 감동도 잦으면 무디리라. 매번 이 밥상을 받는 식구들은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리라. 지난해 봄 선생님댁에 놀러 가 쑥 캐던 때가 떠오른다. 그 뒷산 기운과 그때 흘린 웃음소리도 안겨오는 듯하다. 여린 쑥 듬뿍 넣고 들깨와 콩가루도 넉넉히 넣어 마치 진한 보약 한 대접을 들이키는 듯하다. 그래, 여기가 바로 명선 한약방이다.

유방 재검진을 받은 날이다. 지난달 건강 검진 때 갑상선과 유방 초음파 검사를 추가로 했다. 증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 체크였다. 크고 작은 까만 동그라미가 여러 개 보였다. 의사는 모양이 의심스러우니 조직 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최악의 상황까지 말하며 겁을 주었다. 과도한 시술비와 불필요해 보이는 서비스 제안에 살짝 과잉 진료 의혹이 들어 진단마저 의심되었다. 

어제, 지인이 추천해 준 다른 병원에서 재검진을 했다. 검사가 길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이 있는 모양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선생님의 진단은 단순한 물혹이라 시술도 치료도 필요 없으니 정기 검진 잘 받으라는 말만 하신다. 헷갈리는 두 진단에, 듣고 싶었던 말을 믿기로 결론 내리며 걱정을 쓸어내린다. 병을 고쳐 주는 게 의사 역할이지만, 환자가 많아져야 돈을 버는 병원의 아이러니에 의사들의 양심과 직업윤리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씁쓸하다.

긴 감기와 피로에 괜스레 불길한 상상까지 더해가며 긴장한 3월이었다. 그동안 했던 오만 가지 걱정을 '괜찮다'라는 의사의 말에 떨쳐버렸다. 그러고도 남은 괘씸한 체증을 쑥국이 말끔히 해소해 주는 듯했다. 

봄철 피로에 한약 한 첩을 달여 마신 것 같다.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감사를 전한다. 함부로 아프지 말라는 말을 한다. 죽으면 혼난다는 말을 또 하며 우스개 의리를 다진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분홍색 드레스 코드를 딱딱 맞춘 우리의 텔레파시를 찬양한다. 빈 막걸리 통을 들고 엉성한 춤까지 보태며 우리의 시간을 달궜다.

영원한 건 없다. 영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랑도, 인간관계도 영원하지 않았다. 이 좋은 <다누라>도 영원하길 바라지만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돈은 쓰는 사람이 임자고, 행복은 누리는 자의 것이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지금, 여기서, 건강하게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야 한다며 우리의 잦은 모임을 정당화한다. 인생의 빽 같은 인연과 운명이 감사하다.

명선 한약방의 짧은 봄밤이 흐른다. 정성 듬뿍 담긴 밥상과 기꺼이 해 주시는 마음, 거기에 더한 다섯 여자의 웃음이 조용한 밤을 소란스럽게 채운다. 영원할 리 없는 벚꽃은 가로등 아래 나부끼고 빌빌거리던 3월 몸살은 훌훌 털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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