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음식 투정과 애정 결핍증이 발병했다.
아들이 분가했고 딸은 몇 년째 유지어터라 바나나와 고구마 반쪽이면 저녁식사가 해결된다. 남편과 나, 둘만을 위한 음식 준비에 소홀했다. 남편의 불만이 터졌고, 섭섭한 감정이 오갔다.
여태껏 살아도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게 바로 음식에 대한 이해다. 오십 중반이 되어도 사진처럼 남은 집착이 해결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불만은 아버지에게 더 많았을 텐데, 엉뚱하게도 엄마의 바쁨과 정성 부족에 핑계가 쏠린다. 남편이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다. 가정을 돌보는 여성상, 아내상, 엄마상을 내가 보여주길 원한다. 퇴근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두고 방긋 맞이해주길 바란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내게 갈구하며 음식이 곧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엔 내 취미와 솜씨와 정성, 삼박자가 다 부족하다.
갈급함과 갈급하지 않음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만들었다. 서로가 원한다고 해서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
"왜 뭐 때문에 음식이 그렇게 중요해?"라고 따져봐야 그건 왜 태어났느냐는 질문처럼 원론적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당분간 비위를 맞춰주고 달랠 수밖에 없다. 글과 음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당면 과제다. 직장인의 워라벨과 같아 자칫하면 삐거덕거려 불만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 협회 일로 귀가가 늦었다. 으레 음식으로 꼬투리를 잡았다. 이기려 들면 한이 없다. 그래봐야 나만 손해다. 납작 엎드려 비위 맞춰주는 게 상책이다. 바뀌지 않는 걸 25년이나 안고 살고 있다. 그의 음식 투정이 그렇고, 알면서도 여전히 고치지 않는 내 고집은 더 문제다.
이틀 연속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남편을 위한 멍게와 해삼을 사고 딸이 요구한 딸기와 바나나를 샀다. 내가 먹고 싶은 애플망고와 체리는 눈으로만 훑고 넘겼다. 아무거나 잘 먹는 내 기호는 언제부터인가 실종되었다. 딸이 좋아하는 것,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가정 안의 작은 부속품처럼 내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
보름째 달고 있는 감기를 떨궈버리기 위해 약을 먹고 한숨 자려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책을 펼치고 앉았을 때 어머님이 오셨다. 딸기 소쿠리 네 개를 테이프로 붙여 놓은 걸 사 오셨다. 딸기 복 터진 날이다. 큼직한 상품이 아니라 중간치 딸기다. 네 소쿠리 통틀어 만 원이란다. 딸기값이 이래서야 농부들은 테이프 값도 안 나오겠다. 값이 싸니 물건이 옳을 리 없다. 임대료 받으며 충분히 쓰실 돈 있으신데도 평생 당신 위해서는 좋은 걸 사 드시지 못한다. 자식들 키우느라 늘 뒷전이었던 습관이 여든 넘어까지 이어진다. 우리 먹으려고 사 둔 큼직한 딸기가 죄송스럽다.
할 수 없이 잼을 만들기로 했다. 9시면 강의다. 뭉근히 졸이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마음이 바쁘다. 운동하러 나가려는 딸에게 꼭지를 때 달라고 부탁했다. 멀쩡한 건 통에 담고 물러진 건 냄비에 담았다. 유기농 설탕 한 봉지를 넣어 가스에 올렸다. 설탕이 녹고 딸기에서 물이 나오니 끓어올라 넘치려고 한다. 큰 냄비로 옮기려니 다락에 올라 꺼내 올 일도 귀찮다. 작은 냄비 하나를 더 꺼내 두 군데로 나눠 담았다. 점점 졸아들어 뭉근해지자 즙이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호박죽 끓일 때와 같다. 딸기잼의 분노다. 용암처럼 끓어올라 솟구친다. 싱크대 상부장에도 타일에도, 내 팔에도 무섭게 튀어 오른다. 응어리진 화를 뿜어내듯 공격적이다. 내 모습도 이런 건 아닐까?
"자기는 남한테는 전혀 예민하지 않은데 혼자서 스트레스를 다 받는 모양이다. 자기, 아빠 닮았지?"
어제 만난 언니의 말이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오래 들러붙어 있다. 코로나도 아닌 것이 진득하니 애를 먹인다. 감기보다 귀가 아프니 더 문제다. 쉬어야 하는데 해야 할 일이 있고 모임도, 나갈 일도 많다. 수시로 잠을 자며 회복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마음처럼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상대에게 별로 예민하게 굴지 않는데, 몸이 예민하다. 분출하지 못하고 참는 게 원인인지도 모른다. 화 날 일이 잘 없기도 하지만, 아빠를 닮았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고 자랐고 여태 그렇게 살았다. 그건 천성이기도 하겠지만 체면과 양심, 인격이란 알량한 포장인지도 모른다. 이게 건강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쏟아내는 게 참는 것보다 어렵다.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화가 나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오히려 입을 닫았다. 원인이 뭐였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한다. 어차피 화를 못 낼 거면 빨리 태세 전환하는 게 유리했다. 순전히 나 살고자, 나 편하고자.
부글거리는 딸기잼을 보니, 성난 용암 같다. 사람도 화를 낼 땐 저 모양이리라. 여기저기 함부로 튀어 올라 공격하고 퍼부을 테다. 제 모습이 어떤지도 모른 채. 반대로 부글거림을 참아 내는 보이지 않는 마음도 저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화는 바깥을 향하던 안을 향하던 어느 쪽은 해를 입기 마련이다. 그게 상대일 수도 있고 자신일 수도 있고 몸일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다.
소리 지르고 화내는 사람이 무섭다. 분출하는 화산은 목적지가 분명하다. 당사자에겐 편리한 방식일 테다. 쏟아내고 털어버린다는 사람은 속도 편해 보인다. 화를 받은 사람은 상처가 나고 데여서 여전히 따가운데 말이다.
그럼 터트리지 못하는 화는 어디로 갈까? 한의학에서 말하는 화병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는 걸까? 그럼 쏟아내는 사람은 과연 화도 스트레스가 없는 걸까?
아닐 테다. 쏟아내는 사람도 참아내는 사람도 피해 갈 수 없을 테다. 화의 양면성이다. 누구에게도 승자가 없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화의 최종 목적지는 누구를 향할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성숙한 인간에 도달할 것인가로 향하면 좋겠다. 그게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방향성이 아닐까.
딸기잼은 좋겠다. 마음껏 솟아도 탓하는 이 없으니까. 오히려 마음껏 분출한 후에야 잼이 되니까. 심지어 화났다고 살살 달래며 저어주기도 하니까.
실컷 쏟아내고도 예쁘고 맛있는 잼의 운명에 살짝 샘이 난다. 터트리지 못한 내 마음도 살살 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