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배 여사와 물만골 8화 - 기억

by 꽃보다 마흔

기억:

기억은 시간의 양(量)에 비례하지 않는다. impress! 나를(I'm) 누르는(press) 것, 가슴에 와닿는 것만이 기억으로 저장된다.


정배 여사의 팔순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그때 정배 여사는 의료기 체험 사무실에 매일같이 출근하고 있었다. 소장이랑 실장이 어찌나 친절한지 자식들보다 낫다며 매일 사업장에 가는 이유를 설명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의 기분보다 우선시 되는 건 없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성보다 느낌으로 결정한다. 가뜩이나 특별한 일이라곤 좀처럼 없는 노인들에겐 기분이야말로 생의 활력소가 된다. 그들은 오느라 수고했다고 건강 음료를 챙기고 100번 손뼉 치기와 스트레칭을 시키며 기분을 챙겼다. 그러니 선착순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때론 새벽같이 집을 나서곤 했다. 의료기라면 이미 몇 개나 사고 버린 경험이 있지만, 젊음만큼 강력한 묘약이 없다. 병이 낫는다는 말은 늘 의심스럽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희망이기도 하다. 오만가지 병이 다 나았다는 체험자의 수기는 소장의 설명보다 강한 최음제다. 체험장에 오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의료기를 사면 괜스레 실장 보기 미안해져 반대하지 않는 나를 굳이 이해시키려 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정배 여사가 불러서 가보니 어느새 태양열 의료기 매트가 침대 위에 떡하니 깔려 있었다. 나더러 옷을 벗고 1시간만 누워 있어 보라고 했다. 그러면 아픈 곳이 드러난다고. 코웃음이 났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못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시어머니 앞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이불에 들어가 누웠다. 정배 여사는 온도를 높여 주고 이불을 덮어주고선 마치 최면을 걸듯, 이 돌은 그냥 자석이 아니라 태양열을 넣은 특수 자석이라는 설명을 했으나 나는 1절도 채 듣기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어떻노?"

정배 여사는 드디어 마취에서 깬 아들을 보듯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 데도 안 아픈데예?"

"..........."

내 반응이 적절치 못했던 걸까?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나? 끈끈한 땀이 난 것 외에는 아무런 증상을 찾지 못했다. 당신처럼 등도 아프고 옆구리도 아파야 이 매트 구매가 정당화될 텐데, 안타깝게도 나에겐 먹히지 않는 요술병처럼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반응에 굴복하지 않는다.

"내 하나 사 줄게, 너도 하나 써라."

"아니예 어머님, 됐습니다. 저희는 필요 없습니더, 어머님 산 거 이거 잘 쓰다가 나중에 저희 물려주시면 됩니다. 함부레 돈 쓰지 마세요, 어머님."

매트 이야기는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했으나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딸 침대 위에 매트가 깔린 게 아닌가. 당황스러웠지만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감사히 잘 쓰겠다고 말했다.


사건은, 그래 그건 사건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트가 우리 집에만 온 것이 아니라 시누이들에게도 다 발송된 것이다. 당신 것과 다섯 자녀, 총 여섯 개를 구매하셨단 말이다. 택배를 받은 시누이들에게서 하나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택배에 모두 당황할 만도 하다. 정배 여사는 중년이 된 자녀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집집마다 선물로 보냈으나 누구도 반가워하는 이 없었다. 오히려 달갑잖은 선물을 받고 엄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큰 시누이가 며느리는 하지 못 하는 말을 조곤조곤하며 엄마가 속은 거라는 결론에 동의하게 했고 당신 것을 제외한 다섯 개를 반품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기념으로 자식들한테 선물 하나씩 해주고 싶었는데, 사 줘도 안한다카믄 우짜믄 좋큿노?"

"어머님, 꼭 그러고 싶으면 금가락지를 하나씩 해 주세요. 그건 저도, 딸들에게도 기념이 되고 좋겠네요. 가격도 매트 가격이면 충분하겠고요."

"그거는 반품 안 시키겠나?"

"아유 그럼요 어머님, 금가락지를 왜 반품시켜요?, 정 하시고 싶으면 매트보다 그게 훨씬 낫겠어요."

"그라믄 내일 금방에 한 번 나가보자."


'퀴즈! 어머님이 금가락지 안쪽에 기념 문구를 써 달라고 부탁했는데, 과연 그 문구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팔순 모임을 위한 가족 단톡방은 슬슬 달아올랐다. 태양열 매트로 어수선했던 일은 어느새 정리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내가 낸 퀴즈에 예상대로 뻔한 답이 올라왔다.

'팔순 기념! 신정배 팔순 기념!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훔!'

정배 여사 속 모르기는 딸들도 마찬가지다.

정배 여사는 대부분의 부모님들과는 달리, 당신이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씩 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선물은 커플 금가락지로 결정되었고 자식들은 각자의 손가락 사이즈를 단톡방에 올리는 중이었고 나는 정배 여사와 금방에 들러 디자인을 고르는 중이었다. 다 고르고 난 뒤 정배 여사는 사장님께, 금가락지에 쓰고 싶은 글이 있는데 몇 자까지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어떤 걸 쓰고 싶은데요 어머님?"

"지혜, 건강, 복. 그거면 내가 주고 싶은 거 전부 다다."

허를 찌르는 건 정배 여사의 특기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끝이 빨개진다. 금반지를 쥔 손에 힘이 빠진다.


누구나 여태 일어난 일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모든 일이 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impress'라는 단어를 설명하실 때 im과 press를 따로 떼어 설명하며 '나를 꾹 누르는 것이 곧 감동'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더 자라서 나는 기억이 있어야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감동한 일은 자동으로 기억된다는 것도 알게 되어 일상의 많은 것들을 감사, 감동하는 게 결국 잘 사는 것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정배 여사의 메시지도 impress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예상치 못한 문구다. 기억을 기록까지 해서 끼고 다니니 기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억의 특성을 봤을 때, 일 년 360일보다 일주일 한 여행이 더 많이,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은 아름다운 시간을 많이 만드는 게 성공한 게임일 수도 있겠다. 나아가 아름다움과 감동을 많이 주는 사람이 이 게임에서 승자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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