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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1. 2016

잉글리쉬 페이션트

쇄골 절흔의 슬픔과 아름다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행위를 끝낸 사내가 여자의 쇄골 절흔(여성의 양쪽 쇄골 중간에 움푹 들어간 곳)을 가리킨다 이곳은 내 것이오. 사내의 검지 끝에 힘이 실린다. 간절해진다. 내 것! (중략) 그러니 울타리를 쳐야지. 작은 문패라도 달아야지. 이곳만은 내 것이오. 그래 부디 내 것 한없이 사소한. (이미산의 시 쇄골 절흔 중) / 


  사막 탐험가 알마시는 동료 부인인 캐서린의 쇄골 절흔을 내 것이라며 ‘알마시 협곡’으로 명명한다. 


“매일 밤 당신을 잊으려 해도 아침이 되면 또다시 사랑이 벅차오르더군” 


소유하는 것도, 소유당하는 것도 싫어하던 그가 소유의 열정에 사로잡힘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첫 장면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경비행기로 아프리카 초원을 비행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촬영된 장소는 사하라 사막의 인접지역인 튀니지 서남부의 미데스 협곡이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사막의 상공을, 금발의 여인(캐서린)과 한 남자(알마시)가 경비행기를 타고 날다가 포격을 받고 추락한다. 이를 목격한 원주민들이 전신 화상을 입은 남자를 군인병원에 호송시키게 되고 그때부터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이 사람을 “잉글리시 페이션트(영국 환자)”로 부르게 된다. 



  영화는 회상과 현재가 차례로 이어진다. 

요염해 뵈는 모래 능선과 움푹 팬 골짜기의 흥건한 어둠은 여인의 풍만한 둔부와 그곳에 이르는 휘어진 등의 겹침같이 느껴진다. 아름다움은 때로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법, 죽음처럼 달려드는 모래바람에 사랑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이 사랑의 불구덩이 아닌가? 비록, 반역과 배신, 불륜과 죽음으로 헝클어진 이야기지만 사랑의 본질 쪽에서 그들의 처지와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헝가리 출신의 백작 알마시 (랄프 파인즈)다. 국제 지리학회 팀의 일원으로 아프리카 북부 사막 지대의 지형을 조사해 지도로 작성하는 일을 하던 알마시는 영국인 귀족 부부 제프리(콜린 펄스)와 캐서린 클리프턴(크리스틴 스코트 토마스)을 만나게 된다. 알마시는 처음 본 순간 캐서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곧 금지된 사랑에 빠지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관계를 눈치챈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제프리는 캐서린을 경비행기에 태운 채 탐사에 열중하고 있는 알마시에게 돌진하지만 추락한다. 장본인 제프리만 즉사하고 캐서린은 심한 부상을 입는다. 알마시는 캐서린을 사막 한가운데 동굴로 옮기고 먹을 것과 손전등, 헤로도토스의 책과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구원 요청을 하러 떠난다. 사막을 사흘 밤낮 걸어가 우여곡절 끝에 사막 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연료를 얻어 비행기로 동굴에 돌아오지만, 그곳엔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캐서린의 시신과 그녀가 남긴 편지만이 기다리고 있다. 


  의무부대가 이동하던 중 부상이 심각한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위해 담당 간호사 한나(줄리엣 비노쉬)가 대열에서 떨어져 투스카니의 낡은 수도원에 머무르며 알마시를 간호한다. 어느 날 한나는 무너진 수도원 돌 더미에 묻혀 있던 낡은 피아노를 발견한다. 그리곤 한쪽 다리가 부러져 비스듬히 기울어진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중 아리아를 연주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영화의 시간과 공간이 음악 안으로 녹아듦을 보여주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뢰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고물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전쟁에서 피어난 한 떨기 장미 같은 부조화와, 알 수 없이 멈춰 선 시간의 공간감에서 음악의 색다른 힘을 표현한다. 



  아무렇게나 미장한 시멘트 뭉치처럼 일그러진 알마시는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어려워진다. 그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를 한나에게 들려준 후 치사량의 모르핀을 주사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한나는 그 청을 들어준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사막의 곡선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쌍엽기의 그림자, 모닥불과 함께 하는 사막의 밤, 별을 지우며 달려들어 모든 걸 파묻는 모래바람, 세상의 경계를 지도로 만드는 사람들, 끝없는 기다림에서 이어지는 죽음, 한나를 위해 마련했던 수도원의 촛불 길과, 밧줄을 타고 성당의 벽화를 보는 장면 등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이 많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지킬 수 없던 약속이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처연하다. 이따금 마르틴 슈타트펠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알마시 협곡’이라 명명한 쇄골 절흔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오버랩시키곤 한다.     




Glenn Gould  - Goldberg Variations  BWV.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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