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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3. 2016

 
베니스에서 죽다

토마스 만의 소설과 비스콘티의 영화





  슬픈 멜로디는 중독성이 있다. 

죽음의 비감함마저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게 음악이다.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황량한 바다, 두 가지의 경계 없는 공간에서 시간을 상실하고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도 측량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말러 심포니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용해되듯 흐른다. 컬러지만 흑백 분위기가 있는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1875~1955)은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여행하던 중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는다.(1911년 5월 18일 말러 사망) 토마스 만은 당대의 어느 작가보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고, 특히 말러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작가는 말러의 애제자이자 벗이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상심에 빠진 토마스 만은 아름다운 베니스의 풍광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보았고, 2년 후(1913년)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을 발표한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어느 중년 예술가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토마스 만의 소설은 영화감독 비스콘티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되었다.(1971년) 





  과로와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50세의 작곡가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주인공 역의 ‘더크 보거드’는 말러를 많이 닮았다)는 휴양 차 베니스의 리도 섬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가족과 휴양 온 폴란드 귀족의 미소년, 타지오(비요른 안데레센은 정말 아름다운 소년이다)를 보게 된다.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흐트러짐 없는 성격이던 아센바흐는 그리스 조각 같이 아름다운 타지오에게 걷잡을 수 없는 외사랑에 빠진다. 오십 평생을 도덕주의자로 살아온 중년의 영혼을 뒤흔들 만큼 매혹적이고 강렬하다. 베니스의 거리로 혹은 성당으로 미소년의 뒤를 따르며 그를 바라보는 것에 혼을 뺏긴다. 낙이라기보다 애절한 몸짓이다. 베니스에 이름 모를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자들이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았던 그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만이 그를 바라볼 수 있음에 행복해한다. 결국 도덕적 의지가 망가지고 정신도 혼란해진 그는, 파란 수평선을 배경으로 물속에 서 있는 타지오가 자기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수영을 즐기던 타지오를 바라보던 바닷가에서 등받이 의자에 홀로 기대앉아 죽음을 맞는다.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에서 작곡가로 바뀌었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초현실적인 이데아의 길목인 양, 영화 내내 흐르는 말러 교향곡의 5번 4악장은 비스콘티가 말러에게 바치는 ‘헌사’ 임을 암시한다.

 

  면허 없는 곤돌라 사공과의 말싸움, 다른 곳으로 잘못 배달된 짐 가방으로 인해 베니스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거나, 연례적인 행사로 실시하는 소독이라는 호텔 측의 거짓 답변, 여행사 직원에게 들은 전염병 만연 사실 등은 원작과 거의 같다. 특히 이발소에서 희게 화장한 아센바흐의 얼굴에선 죽음의 그림자가 암시되었는데 죽을 때 머리카락을 염색했던 약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슬픔을 배가시킨다. 

 

  

  폴 발레리가 ‘미(美)란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영화는 그 비극적 아름다움을 꼼꼼하고 가슴 뻐근하게 보여준다. 아센바흐는 베니스에서 창궐한 전염병으로 죽음을 맞으면서 예술가로서 성취 못했던 사랑을 자신의 죽음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의 의미는 ‘소년’이 아니라 ‘아름다움’이고 주인공 아센바흐는 ‘중년 남성’이 아니라 ‘탐미적인 예술가’인 것이다. 

 

  1번 교향곡의 초연 때는 표가 한 장도 팔리지 않을 정도였고, 4번 교향곡의 뮌헨 초연 때는 신문들이 정신 나간 음악이란 악평을 쏟아내는 통에 크게 실패했던 구스타프 말러!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아름다움만이 눈에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말러를 찾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온갖 장치에 신음하는 현대인들이 말러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글이나 누군가의 음악에 도취했을 때 불확실하던 나의 일부를 찾게 되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곧 영화 첫머리에 나오는 “정신의 끊임없는 움직임”(motus animi continuus : 플로베르가 루이제 콜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따온 것)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소설가 토마스 만과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말러는 베니스에서 죽었지만 실제 말러는 비인에서 눈을 감았다. 생전에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그에게 영원한 고향이 생긴 것이다. "예술은 일종의 고양된 삶이다. 예술은 더 깊은 행복을 주었다가 더 빨리 소모시킨다."는 소설 구절처럼, 예술은 삶을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렸다가 사라지는 극한의 빛과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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