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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May 31. 2017

수식이 필요 없는 말, '아름답다'

2017,  Journey preview - Jasper



 '세상에서 가장~  '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 말이 마땅치 않다. 

세상에서 제일이라거나,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그 표현의 근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이라고 하자.

'가장'과 '맛있는'이라는 단어는 각각 부사와 형용사로,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이 어떤 누구의 입맛에는 최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말은 어떤 기준이 되는 통계가 없는 형용사에 가져다 붙일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 '세상에서 가장 키가 작은 사람' 같은 이를테면 기네스에 오를 수 있는 어떤 수치적인 기록들은 당연히 사용할 수 있다.


  캐나다 로키에 있는 호수들을 검색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레이크 호수><모레인 호수><멀레인 호수> 등,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표현은 단 하나의 사물에만 붙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 가면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고 슬로베니아의 블러드 호수에 가면 그곳이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는 수도 없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은 '아름답다'라는 말 하나로 충분하다. '아름답다'라는 말에 뭔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호수가 아름답다.' 이 표현 하나로 부족하다면 '아름답다'라는 말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한다.



  사촌들이 살고 있는 캠룹스 (Kamploops)에서 비아 레일을 타고 재스퍼까지 간다. 기차를 타는 9시간 30분 동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세상의 온갖 푸름을 쏟아놓은 듯한 풍경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이름 모를 호수의 에메랄드 빛깔의 물과 온갖 크고 작은 초록의 날개를 달고 있는 나무들, 눈 덮인 산, 바람이 굴리고 있는 하얀 구름들이 아름답다. 

   

재스퍼 역


 

   오후 4시, 로키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재스퍼 역에 도착했다. 유명세와 달리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하고 낡은 역의 간판이 정겹다. 오랜 세월이 머금고 있는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한 여름 태양이 맹렬한 기세를 떨치고 있지만 덥다는 느낌은 없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마부가 마차를 몰고 있는 풍경 속을 거닐고 있자니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꽃 같은 미소를 담은 여행자들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따라 나 또한 바쁠 것 없이 걸었다.


  재스퍼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숙소의 수가 넉넉지 않은 이유로 호텔은 일반적인 금액의 2배 내지 3배에 달하는 거금을 투자해야 하고 페어몬트 샤토 루이스처럼 유명한 호텔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젊은 여행자들이 머무는 호스텔 역시 4~5만 원쯤으로 다른 곳에 비하면 3~4배 비싸다. 그나마 빨리 예약하지 않으면 60~70 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도시에서 숙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예약한 곳은 8인실  호스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쪽에서 강한 갈등이 솟구쳤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청춘들이 밤새 시끄럽게 떠들고, 마시고 노래할 터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섞이지 못하고 후회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게 될 내 모습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로키에서의 7일을 그렇게 보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의 고민 끝에 숙소를 로지(Lodge)로 바꿨다. 로지는 산장 형태의 숙소로 호텔과는 차이가 있는데 보통은 통나무집이며 벽난로와 간이 주방을 갖춘 숙소를 말한다. 그동안 많은 나라들을 여행을 하며 적립된 호텔 리워드를 사용했다. 꽤 많은 금액이 절약되었어도 만만치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도 마음이 한결 편하다.  



    다음 날부터 사용할 렌터카 픽업 위치도 알아둘 겸 재스퍼 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바구니에 담긴 피튜니아가 가로등 여기저기에 걸려있어 거리를 더욱 상큼하게 만들고 있다. 청아한 공기와 한 풀 꺾인 햇살이 목덜미에 내려앉은 감촉이 부드럽다. 아이스크림, 피자, 마켓 등 거리 곳곳에 여행자들의 편의 시설들이 즐비하다. 렌터카 사무실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자동차 역시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무리다 싶은 정도로 렌트 비용이 비쌌지만 그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아까워서 포기할 거라면 처음부터 여행을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꾸미지 않은 듯하게 무심해 보이지만 편안한 실내 장식이 맘에 드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다. 대화할 사람은 없어도 여행 책자를 뒤적이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시간을 즐기면 된다. 생수와 간단한 간식, 그리고 재스퍼의 유명한 빵집 곰발바닥에서 아침에 먹을 갈릭 치즈 앤 어니언 빵을 사 갖고 숙소로 향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는다. 작은 마을이지만 박물관과 갤러리도 눈에 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적함이다.      

 

  노트북에 들어있는 음악을 플레이시키고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록키 마운틴에서의 첫 밤이 꿈꾸듯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10시, 렌트한 자동차 크라이슬러를 받는다. 친구들과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이후 두 번째 렌터 카이다. 종합 보험과 갖가지 유의사항과 자동차 매뉴얼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출발한다. 

  


  

  재스퍼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은 단연 멀린 호수이다. 멀린 호수는 다음 날 현지 여행사 브루스터를 통해 크루즈를 예약했기 때문에 가까운 멀린 협곡과 메디신 호수, 그리고 피라미드 호수를 돌아볼 생각이다.  일단 가장 가까운(15분) 피라미드 호수까지 가기로 한다. 호수 속에 완벽하게 데칼코마니로 반영된 주변 산이 피라미드를 닮았다고 하여 피라미드 호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호수라는 이미지가 원래 맑음과 잔잔함을 빼놓고 상상할 수 없지만 거울처럼 맑고 투명하다. 모든 걸 거짓 없이 비춰주는 호수, 그저 바보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카메라에 담기 쉬운 건 없지만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자연이다. 호수와 하늘, 산, 빙하 등 크면 클수록 더더욱 그렇다. 눈으로도 모두 담지도 못하는 자연을 피사체로 삼아 조그만 카메라 앵글에 담아낸다는 행위가 별 의미가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나마 하지 않는다면 기억에서 살아질 테니 안타까움을 대비하여 사진을 찍는다. 물론 마음속에 담는 피사체가 가장 크겠지만 말이다.



  피라미드 호수에서 멀린 협곡까지는 20분,  협곡에는 총 6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제2다리'부터 시작해서 '제3다리'와 '제4다리'를 둘러본 후 '제1다리' 쪽으로 나오는 코스로 돌면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멀린 협곡(Maligne Canyon)은 멀린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애서배스카 강으로 흘러들어가면서, 거센 물살이  주변 지형을 깎아내 만들어낸 협곡으로 깊은 곳은 높이가 50m나 된다. 다리 위에서 보는 협곡은 아찔하면서도 장관이다. 자연 앞에선 할 말을 잃게 된다. 욕심 없이 그저 묵묵히 제 갈길을 흐르는 물, 바람 따라 파이고 부딪히며 제 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바위, 어찌 보면 자연만 한 철학자가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멀린 협곡에서 20분쯤 달리면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나는데 그 산 뒤에 메디신 호수가 있다. 메디신 호수의 길이는 약 7km로 초여름에 물이 가장 많다. 하지만 다른 호수들에 비해 수심이 상대적으로 얕다. 이 호수가 유명한 이유는 가을이 되면 거짓말처럼 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메디신은 호수가 아니라 멀린 강 (Maligne river)에서 애써배스카 강 (Athabasca river)으로 흘러가는 지류이다. 그러므로 가을이 되면 물이 지하로 사라지고 다음 해 여름이 되면 욕조에 물이 채워지듯 다시 호수가 된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마법의 호수 (Magic Lake)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브루스터(Brewster)는 현재 캐나다 로키 여행 서비스의 대표 아이콘이다. 브루스터 트래블은 125년 전인 1892년, 브루스터 형제가 로키 산맥의 가이드를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호수 크루즈나 카누 카약, 밴프 산 곤돌라, 설상차, 헬기 투어까지 다양한 투어를 할 수 있다. 이용 금액이 다소 비싼 게 흠이지만 로키를 즐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 콤보 패키지 상품으로 예약했더니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스피릿 섬(Spirit Island)은 멀린 레이크에 있는 작은 섬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 촬영 명소이다. 주차장에서 호수 선착장까지는 멀지 않다. 멀린 호수 크루즈를 타고 스피릿 섬이 보이는 곳에서 내려서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은 고작 10~20분. 짧을수록 애틋한 법, 영혼의 크기가 저렇게 작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스피릿 아일랜드는 작았다. 로키에서 가장 큰 빙하가 있는 멀린 호수를 1시간 반 정도 둘러보며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동안은 침묵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릿 섬(Spirit Island)


  남극이나 북극에 가야만 빙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브루스터의 특수 설상차를 타면 애서배스카의 빙하 위를 5km 동안 달릴 수 있다. 고대시대에 얼음이 형성된 이야기도 듣고 팔각 수라는 신선한 빙하수도 맛볼 수 있다. 지름이 거의 사람 키와 비슷한 바퀴 하나 값은 500만 원, 설상차 가격은 약 20억이라고 한다. 설상차를 타고 빙하 탐험을 한 후에는 글래시어 스카이워크로 간다. 그곳은 개인 차량으로 갈 수 없으므로 디스커버리센터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글래시어 스카이워크(Glacier Skywalk)는 캐나다 로키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계곡 위에 설치해 놓은 유리 다리 위를 걷는 것이다. 하늘을 걷는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500m에 걸친 트레일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천혜의 자연을 감상하는데 280m 높이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30m 길이의 유리 바닥 플랫폼이 하이라이트이다. 글래시어 스카이워크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의 명소로 재스퍼 국립공원 내 속해 있고 재스퍼에서 1시간쯤 걸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아무리 뛰어난 화질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더라도 실제 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 로키는 어딜 거든 소리 없이 우아하다. 그야말로 수식이 필요 없는 말답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시간과 비례하는지 재스퍼의 사흘이 쾌속선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글레시어 스카이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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